공지사항
임진란 7주갑 기념 제3차 부산국제학술대회 개최 2012-10-17
2012년 10월13일(토) 오전 11시, 부산대학교 학생회관 대강당에서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임진란정신문화 선양회 이종남 회장, 한음상공파종회 이명환 회장, 해주정씨대종친회 정석준 회장, 안동하회마을 보존회, 칠원윤씨 헌민공문중 윤종석 회장, 칠원윤씨 대종회 윤윤수 회장 등의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후원회 회원과 후손 등 30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부산대학교 학생회관 대강당


부산대학교 김기섭 총장님을 비롯하여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정만용 감사의 1부 사회로 


국민의례를 마치고


류한성 수석부회장은 개회사에서 "금년은 임진전쟁이 발발한지 7주갑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62일 오전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문충공 서애 류성룡 선생에 대한 국가제향 사제사를 봉행하고 이어서 오후 안동시내 안동탈춤 야외공연장에서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대제전의 거국적인 국가기념식을 전 국민의 관심속에서 성황리에 거행하였음"을 알리고, "1952년 임진란 6주갑 때는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주제로 충무광장에서 임진란 6주갑 기념 국난극복대회가 개최되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 했다"고도 했다. "저희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조선일보사의 협조로 6주갑 기념행사 사진을 국가기록원에서 찾아 6주갑 기념행사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었으며, 하마터면 단절될 뻔 했던 국가제전의 광범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정부 및 지방자치 단체로부터 방대한 규모의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대제전을 거행하게 되어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며, 문화학술대제전의 핵심이 되는 중요행사의 하나가 4차에 걸쳐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라"고 했다.


"지난 6월29일 서울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임진란 당시의 정치·외교문제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하여 제1차 국제학술대회를,8월25일 오전 전남 담양 추성창의기념관에서 충렬공 제봉고경명선생과 함께 순국하신 여러 열사님들에 대한 국가제향인 사제사를 봉행하고 연이어 전남도립대학교에서 임진란 당시의 사회·문화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하여 제2차 국제학술대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음"을 말하고 "이곳 부산대학교에서 금일 개최하는 제3차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임진란 당시의 경제와 군사를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했다"고 했다.
"10월11일 남해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지(이락사)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순국한 장병들에 대한 국가제향 사제사를 봉행하고 연이어 10월 12일 이곳 부산 송공단에서 임진란 당시의 동래부사 충렬공 천곡송상현선생과 함께 순국하신 여러 열사님들에 대한 국가제향 사제사를 봉행하였음"도 밝혔다.
"또한 이곳 부산은 임진란 최초 최대 격전지인 동시에 마지막 철군지임"을 강조하고. "임진란은 부산에서 시작하여 부산에서 끝이 났음도 간과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에서 개최되는 임진란 문화·학술 대제전을 계기로 미래지향적인 동북아 관계를 정립하는 새로운 기틀이 마련되길 기대하며, 4차에 걸쳐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의 성과물과 그간 학계에서 논의의 중심이 되었던 임진란 논문들을 총정리 하여 '임진란 연구 총서'를 편찬하여 발간하려한다"고 밝혔다.
"본 국제학술대회에서 주제논문을 발표하시고 토론해 주실 국내외 학자님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에 깊이 감사드리고, 더욱이 장소와 제반편의를 제공해 주시고 축사를 해주실 부산대학교 김기섭 총장님을 비롯한 학교 당국자에게 감사드리며 협력주관이 되어 본 국제학술대회를 조직하여 원활하게 운영해 주신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김동철 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드리는 것으로 인사말씀으로 갈음했다.


부산대학교 김기섭 총장님은 축사에서 "아무도 하지 않고 잘 알려교도 않던 것을 훌륭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학문적으로 발굴하고 이를 집대성한다니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치하하고 더욱이 뜻 깊은 학술대회가 부산대에서 개최하니 영광이라"고 했다. 앞으로 많은 성과 있기를 기대하다고도 했다.


환영사가 끝나자 박수로 화답했다.


제3부 학술발표에 들어갔다.
1主題는 '壬辰倭亂과 朝鮮의 經濟'로 金盛祐 大邱 韓醫大 觀光레저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종전 이후 10~20년이 경과하면서 대체로 아물어 갔다활발한 개간 사업의 전개소비 수준의 회복개간의 과열 양상 등 다양한 지표들이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여기에서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새롭게 전환할 필요가 있다전쟁은 전쟁 당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이전 시기 이룩했던 사회경제적 성취가 일거에 무너진다는 점에서 분명 부정적인 요소가 강했다전쟁 당시의 참상과 종전 이후의 침체상을 강조해온 기존의 연구들이 대체로 이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전전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들을 일시에 제거하여 새로운 사회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사실상 경쟁 원리나 경쟁 체제에 대한 관념이 거의 없었던 전근대사회에서 자율적인 개혁은 거의 불가능했다개혁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계기가 있을 때에만 시도되었고또 성공할 수 있었다농민들의 광범위한 반란이나 전쟁과 같은 것이 그러한 계기들이었다농민반란이나 전쟁이 종결되고 나서야 지배층을 중심으로 정부 차원의 제도 개선 노력이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직후 정부의 여민휴식에 기초한 최소 개입 전략도 이러한 상황에서 출현한 것이었다정부의 제도 개선의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면서전전 시기 사회를 옥죄었던 갖가지 모순들이 제거되기 시작했다게다가 전쟁은 그 동안 인구압으로 초래된 만성적인 기근과 전염병의 확산사망자 증가 등으로 신음하던 이전 시기의 온갖 병리 현상들을 한꺼번에 쓸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있었다농업생산력이 다시 증대하고사람들의 영양 상태가 좋아지면서인구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전쟁은 중장기적 경제 성장의 패턴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앞으로 이런 관점의 연구들이 보다 많이 축적되어임진왜란사를 지금보다 한층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점심식사 후 第2主題는 '壬辰亂時期 朝鮮의 物資動員과 戰爭 遂行-軍糧 需給을 中心으로'를 李旭 順天大 史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명군의 참전그리고 격심한 흉년으로 조선정부는 막대한 양의 곡물이 필요했다특히 명군에게 지급해야 할 군량미의 규모는 조선 정부의 재정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따라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전란이라는 비상시국하에 국왕과 신료는 기존의 원칙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신분제의 동요를 야기하는 납속제의 시행이나 당당한 국가에서 시행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보았던 소금전매제 혹은 국영상업 운영그리고 명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는 은광 개발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이는 16세기 이후 흔들리고 있던 조선사회의 운영원리나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했다는 의미도 있었다즉 변화하고 있는 신분질서를 인정하고 성장하고 있는 세력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마련한다거나국가재정운영을 상공업에 기반하는 변화를 모색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러한 제반 시책을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였다때문에 전쟁의 종료와 함께 제반 시책들은 모두 잠정적으로 폐지되고 말았다"한다

3主題는 '壬辰倭乱時期 東洋三国의 武器体系'를  구보타 마시시( 久保田正志) 日本城塞史跡協會 理事長이 발표하고 부산대 허지애씨가 통역을 했다.
"왜란시기 사용된 병기에 대해서, 일본의 철포가 주목을 받고 있으나, 기병전술, 대포 등에 대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17세기 여진에 대한 명, 조선의 대응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고 생각된다. 17세기 여진인의 대두에, 명과 조선이 농락당한 것은 철포에 중점을 둔 채, 대포나 기병에 대한 무게가 극단적으로 낮아진 일본군과의 戰訓에 기반하여 군의 편성이나 전술이 정해졌던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임진왜란은 그러한 점으로부터도, 17세기 동아시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전쟁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고 했다. 

4主題는 '壬辰倭亂과 國際貿易'으로 李憲昶 高麗大 經濟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명의 건국으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이 위축되었다가유럽 상인이 동아시아 해역까지 진출하고 류큐가 교역중심지로서 활발한 동향을 보이고 중국이 1567년 해금을 완화하여 중국 상인의 해상 진출이 이루어지고 일본이 왕성한 해상 진출을 하는 시점에서임진왜란은 일어났다임진왜란 직전 가장 괄목한 변화는 일본의 왕성한 해상 진출이다. 15세기 중엽부터 일본 은이 대량으로 중국과 조선으로 유입된 것이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을 활발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그것을 종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자신감을 토대로 조선과 중국을 지배한 帝國을 건설한 다음 중국처럼 주변국의 조공을 받는 새로운 華夷질서를 구축하고 이러한 제국으로서 세계 무역의 주도권 다툼에 나아가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이 가설은 무역 이익을 추구하고 해외 영토를 확장하여 공명심을 추구하고 일본을 통일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보는 기존의 가설을 모두 포섭할 수 있다이렇게 본다면임진왜란은 일본이 통일되고 해상 진출과 무역이 활발해지는 도상에서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창출하려는 움직임과 기존 동아시아 질서와 충돌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일본의 대외 무역이 성장하고 대외 진출이 활발해지는 것이 임진왜란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가설은 일본의 권력층이 무역이익을 잘 파악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무역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려고 했다면왜 평화적인 수단을 활용하지 않고 대규모 전쟁을 감행한 사실은 설명되지 않는다이것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히데요시의 영토확장욕구와 공명심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교역과 약탈을 병행하는 해적 활동의 전통그리고 자유로운 교역을 제약하는 동아시아의 관리무역질서도 고려해야 한다달리 말해 16세기 후반 일본을 중심으로 왕성해지는 해상활동을 적절하게 규율할 수 있는 교역 질서가 성립하지 않은 것이 임진왜란의 한 원인으로 볼 수가 있다그런데 중국이1567년 해금을 완화하고 조선에서도 16세기에 사무역이 완화되어 한중일 3국간 사무역이 성장하고 있었다그런 점에서 16세기 왜구의 습격과 일본 군대의 대륙 침략을 무역 욕구의 충족으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고 왜구의 약탈욕과 히데요시의 영토확장욕도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넓게 보면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임진왜란의 배경이 되었다조선은 명나라의 조공체제에 깊게 편입된 반면전국시대 이후 일본은 그로부터 이탈하여 있었다중국적 질서로부터 이탈한 일본이 중국의 침략을 위해 조선을 경유하기를 요청하니조선은 더더욱 그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그런 상황이 중국의 참전을 낳았다.
  17세기 전반 동아시아 무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왕성하게 해상 무역을 하던 일본이1630년대 해금 등 무역억제적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하였던 일이다임진왜란이 쇄국의 방향으로 정한 기본 변수라고 보기는 어렵지만대륙 침략의 좌절이 외세의 위협 의식을 더욱 강화한 점에서 쇄국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지원한 점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임진왜란 직후에 明淸교체가 이루어졌지만여진족은 중국의 지배자가 된 후에 1567년 해금을 해제하여 성립한 명나라의 제한적 개방체제를 유지하였고아편전쟁 이전에는 그 개방도를 높이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무역정책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임진왜란 이후 무역에 나타난 가장 주목할 변화는 변경 互市가 제도화되고 대중국 사무역이 공인된 일이다대중국 호시의 제도화는 군수물자의 조달책으로 1593년 중강(中江)개시를 개설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7세기 후반 책문후시의 사무역이 성장하여 1707년 정부는 그것을 공인하고 그에 수세하는 방침을 세웠다무역세는 조중무역에 앞서 조일무역에서 먼저 제도화되었다그런데 조선의 지배층이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동기는 중국보다도 약하여청나라가 해금을 완화한 1684년 후에도 조선은 그것을 1882년까지 고수하여 조선인의 해로무역을 금지하였다조선시대에 무역이 성장하는 추세였지만해상 진출을 포기한 것은 경제발전에 근본적인 한계를 부여하였다일본은 조선만큼 대외 폐쇄적이었으나일본의 지배층이 조선이나 중국의 지배층과는 달리 경제적인 이익을 적극 추구하는 자세를 가졌고 일본의 막번체제 아래의 경제과 마치 축소형 세계경제와 같아서 비단인삼사탕 등의 수입대체화에 성공하는 등 조선을 물론 중국보다도 높은 경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았다

5主題는 '壬辰倭亂과 日本經濟'로 鄭成一 光州女大 콜마케팅(CallMarketing)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너무도 당연한 이 생각에서 출발하여 이 글에서는 임진왜란을 사람(노동력)과 먹을 것(군량)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일본의 국가권력은 두 차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본인을 투입하였으며, 전쟁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을 납치해 갔는가? 그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또 일본은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얼마나 어떻게 조달하였는가? 
이러한 분석과 검토를 통해서 얻은 결론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도요토미의 침략전쟁은 조선과 일본 모두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단기간에 급격하게 이루어진 노동력 손실은 일본경제에도 크나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 막바지에 무차별적인 인간사냥이 자행된 것도 그러한 노동력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은 조선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지만, 군량의 확보가 전세를 가르는 결정적인 원인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군의 초반 승리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던 것도 의병의 저항과 관군의 정비, 조선 수군의 활약,명군의 원병에 따른 보급로 차단으로 일본군의 군량 사정이 크게 악화된 것과 관련이 깊다. ㉢ 임진ㆍ정유왜란은 일본경제에 새로운 촉매제 역할을 했다. 피로인을 통해서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전된 각종 기술과 지식이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나아가는 데 동력이 되어 주었다. 도자기산업을 비롯하여 인쇄출판업, 의학과 주자학 등 학문 분야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 유입된 새로운 씨앗이 일본이라고 하는 토양과 어우러져 일본적인 모습으로 자라남에 따라, 그것이 일본의 근세사회 형성에 보탬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第6主題는 '壬辰倭亂과 明의 財政'으로 洪性鳩 慶北大 歷史敎育科 敎授가 발표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조의 재정 부담이 조선에 파병된 군사의 주둔과 전투에 필요한 비용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각 지방에 가파가 이루어졌고, 왜란이 명 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비하여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군사 대비 태세가 취해짐에 따라 발생한 보이지 않는 부담 역시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직예,하남, 산동, 요동 지역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깝고 京師에 가깝다는 이유로 그 부담이 더욱 컸으며 왜란 후에 재정적인 문제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도 발생하는 등 그 피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명조가 지출한 재정 규모만으로 보았을 때, 임진왜란 당시 명조가 지출한 재정의 규모는 명조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갈 만큼의 수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명조의 재정 여건이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물론 명조 재정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홍무 연간 재정 체제를 처음 수립할 때부터 존재했던 문제일 뿐 아니라, 재정 체제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이미 정통 연간부터이다. 그리고 명조 재정이 심각한 파탄의 지경에 빠지는 것은 1620년대 요동에서 후금과의 대결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임진왜란에 투입된 재정 지출이 없었다고 해서 명조의 재정이 건전한 상황을 회복하거나 유지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없다. 
  문제는 명조의 재정 체제와 군비 조달 체제에 있었다. 홍무제가 수립한 군비 조달 체제는 기본적으로 위소의 자급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경직된 정액 제도와 수평적인 세량 운송 체제는 명조의 효과적인 재정 관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재정 지출 확대에 따른 부담은 전적으로 인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 지출을 억제하는 절약과 인민에 대한 착취 외에는 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 군비 지출이 장기간 확대되면서 명조는 재정 부담을 견디기 어려운 파탄지경에 빠지고 만 것이다. 岡野昌子가 수정한 도식에서 募兵→增稅→民困은 옳지만 그것이 朝鮮援軍으로 인해 발생한 것은 아니다. 모병은 이미 군둔제-세습군호제-위소제라는 세 다리 위에서 안정되었던 명대 군제가 군둔 겸병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발생한 것이고 임진왜란은 募兵→增稅→民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게 만든 여러 원인과 대등한 역할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명조의 재정 위기를 초래하였고 결국 명조의 멸망을 이끌어 17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도식보다는 1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사회의 변동, 즉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에 따른 상업 붐의 형성과 동아시아 역내 무역 관계의 형성이라는 흐름 속에서 명-조선-일본의 관계의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좀 더 거시적인 시각 속에서 임진왜란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시각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金東哲 부산대 교수가 座長으로  綜合討論을 주제했다. 
討論 참여자는 
尹用出(釜山大 歷史敎育科 敎授)
金康植(東西大 敎養敎育院 敎授)
李敏雄(海軍士官學校 人文學科 敎授
金東哲(釜山大 史學科 敎授)
申東珪(東亞大 國際學部 敎授)
韓明基(明知大 史學科 敎授)


토론을 마치고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