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4년 대구지역의 임란사 연구 학술대회 성료 2014-11-02
 



2014년 대구지역의 임란사 연구 학술대회가 2014년 10월31일(금) 오전 10시에 무의공박의장장군후원회 회장 박동수목사공박홍장장군13대종손 박신일경수당박세순장군 후원회덕수이씨충무공파종회 회장 이종천충헌공홍세순선생후원회문충공류성룡선생후원회문경공류운룡선생후원회인천채씨달서재공파 종회옥산전씨대종회영남유교문화진흥원 원장 노진환단양우씨열락당 종중낙재서사원선생달성서씨남산 옥분문중일직손씨모당공 종중해평윤씨지족암공파오음공종회 도유사 윤금영,인천채씨투암공 문중의사노항김(휘 연)선생후원회 회장 김소득학봉선생기념사업회능성구씨대구문태문중벽진이씨완석정공파 종손 이종건벽진이씨완석정공파 종회장 이우각추의사우성전종중, ()임란한천승첩기념사업회영천의병장호수정세아 문중동래정씨임하공파 문중태동공최계선생 종중공산회 회장남호종동래정씨행정공 종중해주정씨대종친회 회장 정두섭충의공권응수장군추모회문화류씨곤산군파 도사공 종중경주최씨한천공파 종중민절공백암김륵후원회의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500여 명의 후원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후원회의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여


시도기를 작성하고 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찬 대강당에서 


  개회사에서 "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는 2012년 임진전쟁 발발 7周甲을 맞이하여 임진전쟁 7周甲記念 文化學術 大祭典을 전 국민의 성원 하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7周甲 행사의 중핵이 되는 사업이 거국적거족적으로 4회에 걸쳐 개최한 國際學術大會였다"고 말했다. "이 학술대회에서 거두어 드린 成果物과 과거에 쌓아 올린 연구축적물을 함께 묶어서 41질의 壬辰亂硏究叢書』 란 서책을 발간하여 배포했다"고 했다.
  "
임진란 7周甲 國際學術大會에서 壬辰亂史에 대해 총체적 총론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2014년부터는 壬辰亂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國內의 여러 거점들을 선정하여 학술적으로 접근하여 전체의 壬辰亂史내지 한국사를 올바르게 기록하도록 하여 임진란사의 정통성역사성을 확립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는 그 첫 번째 연구대상지역으로 대구지역을 선정하여 大邱地域의 壬辰亂史 연구라는 대주제를 정해서 금일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본회와 해를 거듭하면서 끈끈이 인연을 맺어온 이곳 대구광역시 교육청 대강당에서 우동기 교육감님을 비롯한 여러 기관장님 및 내외귀빈들을 모시고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개회사를 요약해 보면 돌이켜 보면 2011년 61일 국가제정 1회 의병의 날에 즈음하여 이곳 대강당에서 본회 주최 영호남 의병활동에 관한 학술대회를 ()영남유교진흥원장 노진환 대회장님의 주도로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이를 시발점으로 2012년 12월 7일 거국적이고 거족적인 임진전쟁 7周甲記念 文化學術 大祭典의 중핵이 되는 국제학술대회를 전국을 순회하면서 개최하고 마지막 행사인 제4차 국제학술대회를 이곳 대강당에서 마무리 하였습니다오늘 개최하는 壬辰亂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거점들 가운데 첫 번째 학술대회가 되는 大邱學術大會를 시발점으로 전국 각 곳을 순회하면서 學術大會를 개최하고 져 합니다2015년 2월 중에는 이웃 영천시에서 가제 永川地域의 壬辰亂史 硏究라는 大主題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져 준비하고 있습니다
임진란 연구총서를 발간한데 뒤이어 본회가 진행하고 있는 역점사업이 61질의 임진란 위훈록』 발간입니다지금까지 발간된 선례가 없어서 많은 애로를 겪고 있습니다만 원고를 300여 단체를 훨씬 초과하는 후원회에 위촉하고서 이를 수압정리 하여 전문가들로 구성된 교정 팀에게 인계하여 교정 작업 중에 있습니다단체회원 여러분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이와 병행하여 660페이지를 초과하는 임진란 화보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선양회가 개최한 각종 행사는 물론이고 단체회원(후원회)이 보유하고 있는 유품기념물을 비롯한 유적들을 빠짐없이 촬영하기 위하여 본회 촬영 팀이 전국에 걸쳐 일일이 출사하여 후원회 자손들과 협력하여 촬영에 임하므로써 영원히 보존되는 역사자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본회가 개최한 모든 행사와 기록들을 빠짐없이 수록한 임진란 백서를 발간하여 향후에 전개되는 각종행사나 사업에 참고자료나 길잡이가 되는 유용한 서적이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이종남 회장의 개회사를 류한성 수석부회장이 대독했다.

 
  “‘
대구지역 임란사연구 학술대회를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며 최근에 개봉된 명량이란 영화를 언급하며 누적 관객이1,700만 명이 넘어선 흥행 덕분에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면모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고 했다.
주시하듯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전은 일본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결국 우리나라에서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는 계기기 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임진왜란에 대하여는 얼마나 아느냐” 반문하고, “특히 임진왜란 때 우리 지역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의병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이런 점에서 오늘 임란사연구 학술대회는 우리 지역의 역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의병은 임진왜란 때 관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불과 수십 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 없는 백성들이 무참히 짓밟히자,스스로 동족을 구하고 고향을 지키며 나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언급하고의병은 양반에서 일반 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한마음으로 일어나 목숨을 걸고 향전하였으며그들은 자신이 살던 고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고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그에 알맞은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도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음은 물론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수가 관군을 능가했고 전과도 관군보다 컸다고 설파했다.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오늘의 이 학술대회를 계기로 임진왜란의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고선조들의 우국충정을 되새김과 동시에 우리의 역사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축사를 가름했다.


1주제로 '임진왜란기 대구지역 지방관의 전쟁대응과 민의 전쟁체험'을 정해은(한국학 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박사가 발표했다.
"이 논문은 1592년 4월 임진왜란부터 1598년 11월 정유재란까지 대구의 전황을 검토하고수령과 민이 일본군의 침략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고 대응해나갔는지 검토한 글이다필자가 임진왜란기 대구 지역의 상황을 검토하면서 고심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임진왜란기 대구에 대한 이해가 임진왜란사 연구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전쟁을 일상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의 폭을 어떻게 넓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현재 임진왜란사 연구에서 대구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인근의 경주나 영천처럼 관군의 활동이 활발했던 편도 아니며이름 높은 의병장이 출현한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이 점은 이 지역의 연구 경향에서도 잘 드러난다현재 역사학계에서 임진왜란기 대구 지역에 관한 연구는 월곡 우배선을 제외하고 찾아보기 힘들며몇 몇 단행본이나 논문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대구는 1592년 4월 21일에 일본군이 침략한 후 1593년 5월 15일 퇴각할 때까지 1년여 동안 일본군이 점령한 곳이었다일본군은 대구를 후방 보급로이자 중간 기착지로 활용하면서 인근 지역을 공격하였다그리고 대구는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곧바로 명군이 주둔한 지역이었다명 총병 유정이 팔거에 1년 정도 주둔하면서 대구는 경상 좌도와 우도를 연결하고경상도의 북쪽과 남쪽을 이어주는 중심지로 부각되었다따라서 임진왜란기 대구에 대한 이해는 일본군과 명군이 오랜 기간 주둔한 곳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 논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선조실록과 각종 일기자료를 토대로 임진왜란 초기 대구지역의 상황을 재구성하고,수령 및 사족들의 전쟁 대처 방식을 검토하였다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부사 윤현은 군사를 이끌고 좌병영으로 이동하였다좌병영에서 퇴각한 윤현은 동화사로 들어가 관군을 지휘하면서 전쟁에 대처하였다대구부 및 인근 지역의 전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한편주요 지역에 복병을 설치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다또 대구 지역에서 사족들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는 일도 지원하였다
  이후 대구부는 1596년 감영이 되고 정유재란 때에 공산성을 중심으로 내지와 전장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였다.도원수 권율 및 관찰사 이용순 등이 주둔하면서 방어 거점지로 활용되었으며경상 좌도와 경상 우도경상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으로서 사방에서 오는 곡식들이 대구를 거쳐 경주 및 울산으로 이송되었다대구부도 15979월에 일본군의 침입으로 공산성의 군량과 물자들이 파괴되지만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종전 이후 조선후기 내내 경상 감영으로 자리하게 된다
  한편대구부의 사족들은 1592년 10월 경 적세가 치성해지자 대구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다그리고 1593년 5월 중순경 일본군이 퇴각하자 다시 대구부로 귀향하기 시작하였다사족들은 농사에 집중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생존해나갔으며이런 속에서도 의례나 독서 등을 통해 사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이것은 사족들의 변하지 않은 일상이면서 그들이 전쟁 중에서도 지키려고 한 가치와 신념이었다
  이처럼 임진왜란기 대구부의 상황은 내부적으로 수령과 관군의 역할나아가 의병부대의 활동을 다양한 시선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단서이자외부적으로는 일본군과 명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이다그리고 이 안에서 사족과 민들의 생존 방식은 임진왜란기 민간의 삶과 일상에 접근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고 결론을 냈다.




많은 분들이 발표 논고를 보며 경청하고 있다.

 

 

 


2주제로 '대구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을 구본욱(대구가톨릭대 협력교수) 박사가 발표했다.

 

조선 중기 대구지역의 유림은 임진란 이전에 명종과 선조연간에 활약하였던 溪東 全慶昌(15321585),松潭 蔡應麟(15291584), 林下 鄭師哲(15301593) 선생과 이들 3분 선생으로부터 강학을 받았던 門人과 再傳弟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향하는 학문은 퇴계학이었으며硏經書院을 중심으로 퇴계의 문인이었던 전경창이 주도하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서사원이 413일 임진왜란 발발 인지한 후 5월 28일에 이르러 팔공산으로 피난을 온 대구지역의 인사들이 팔공산 夫仁寺에서 회합하여 倡義를 발의하였다고 보았다.
결론으로 
첫째대구지역은 왜적의 주요 침입로로 임진란 초기에 이미 점령을 당하였다또한 점령 후 대규모 부대가 주둔하였기 때문에 義兵陣을 구성하는데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왜적이 침입한 3개월 후 7월 6일에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지역의 의병을 조직하였다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몇몇 의병장들은 자신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전투를 하였으며 경주나 함창 등지로 나아가 다른 지역의 의병장들과 연합하여 전투를 하기도 하였다.  공산의진군은 부인사에 의병소를 두고 동화사의 관군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그래서 정유년(1597)이전에는 왜적들이 팔공산으로는 침입하지 못하였다공산의진군은 임진란 초기에 크게 활약을 하였는데 그 이후에는 왜적과 전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그러나 곽재겸과 류요신이 갑오년(1594, 선조 27)에 공산의병소에서 군무를 보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의병소는 임진란이 종결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대구지역 의병의 구심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대구지역의 의병은 다른 지역과 달리 개별적인 의병활동보다는 대구의 전 지역에 의병을 조직하려고 하였다그래서 향회를 개최하여 공산의진군을 결성하게 되었다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원동력은 임진란 이전에 연경서원 등의 강학을 통하여 형성된 인재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이와 동시에 대구의 유림들은 각기 자기의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진을 구성하여 팔공산해안파잠비슬산금호강낙동강 지역에 이르기까지 임진란이 종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셋째팔공산에서 제1, 2차 회맹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1차 회맹은 1596(선조 29, 병신) 3월 3일에 있었고 2차 회맹은 동년 9월 28일이었다. 1차 회맹은 도체찰사 유성룡이 주관한 것으로 관군과 의병이 함께 행한 것이다. 2차 회맹은 영남의 의병장들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으로 보인다논자는 이 논문에서 회맹에 참가한 의병장의 명단을 최효식이 정리한 것을 토대로 다시 작성하였다그러나 더 많은 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加減 내지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대구의 유림들은 왜적이 재침하였을 때 화왕산 회맹에 참여하였으며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 온 왜적들과 달성과 공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그리고 울산의 서생포 전투와 종전 후 일본과의 강화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것을 알 수 있었다또한 논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임진란 당시에 의병은 관군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하였음도 아울러 확인하였다했다.


3주제는 '임진란 초기 대구지역 의병항쟁'을 이욱 순천대 교수가 발표했다.
16세기말 발생한 임진왜란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요동케 한 세계대전이었다전쟁 피해국인 조선의 입장에서는 건국 후 200여년 만에 발생한 민족의 일대 수난이었고사회전반에 급속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이러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의병이 큰 역할을 했음은 異論의 여지가 없다따라서 의병에 대한 연구는 임진왜란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전이었다는 종래의 그릇된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주제이며 동시에 당시 향촌사회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임진왜란 연구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의병운동은 적의 후방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고 곡창 전라도를 지켜냄으로써 국난극복의 轉機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의 의병운동보다 주목을 받았다. 이를 통해 경상도 의병의 활약상과 의병 조직의병활동의 사회적경제적 배경 등 다양한 측면이 밝혀졌다그런데 기존 연구들은 저명한 의병장이나 의병활동에 치중되어 있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경상도 의병에 대한 종합적이고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소규모 의병장들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당시 경상도는 북상한 일본군의 후방보급로였으며전쟁 막바지까지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저항하던 지역이었다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패퇴시켰던 의병들의 활동은 일본군의 충원과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전력을 약화시켰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경상도 지역 의병들의 활동은 그 규모나 戰功전쟁사적 비중과는 상관없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대구에서는 일본군의 공격과 약탈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즉 군사를 조직하여 맞대응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그것은 일본군의 약탈에 대한 섣부른 반격이 오히려 가혹한 보복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이 때문에 대구의 의병 활동은 일본군의 공격과 약탈로부터 피난지를 방어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임란 초기 대구의 의병항쟁은 팔공산으로 피난하지 못한 사족이 주도하여일본군의 약탈에 저항하는 향토방위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서재겸 부대처럼 일본군 진지를 기습 공격하기도 하였지만전력의 열세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조의 교서와 이웃 지역 의병 활동에 자극을 받아 1592년 7월 6일 제1차 공산의진이 결성되면서 의병 조직의 규모가 대구 전지역을 포괄하게 되었다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 이전 연경서원을 통해 대구 지역 사족 전체가 일정한 연계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4주제로 '임진왜란 시기 대구권역의 의병운동'에서 부주제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를김강식한국해양대 HK교수가 발표했다.
지금까지 임진왜란 시기의 대구권역에 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먼저 임진왜란 시기에 대구권역에서 일어났던 의병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있으며, 다음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대구권역에서 있었던 전투와 인물을 다룬 연구가 있다이 가운데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대구권역의 전투에 대한 연구는 의병활동을 한 인물에 대한 개별연구, 대구권역에서 활동한 관군의 활약에 대한 연구, 의병장郭再祐金沔鄭仁弘의 활동 속에서 대구권역을 다룬 연구, 전라도 의병의 경상우도 활동 속에서 다룬 연구, 대구 지역 전투에 대한 자료를 소개한 연구로 나눌 수가 있다. 
임진왜란 시기에 대구권역은 일본군의 진격로 가운데서 中路와 左路에 위치하고 있었다때문에 대구권역은 임진왜란 개전기부터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었으며의병운동도 일어나 전개되었던 지역이었다.강화회담 시기에 대구권역에서는 일본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운송로 확보를 위해 지속적으로 주둔하면서 많은 약탈을 하였으며조선군명군의 추격과 주둔으로 많은 부담을 졌던 지역이었다.고 분석 했다. 
 한편 대구권역의 의병운동은 지역민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아울러 다른 지역에서보다 의병과 관군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대표적으로 초유사 金誠一의 적극적인 의병에 대한 지원이 있었으며경상감사 金晬도 전국이 안정된 이후 의병에 대한 지원을 하였다대구권역 의병활동의 중요한 성과는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보급로이자 약탈로 역할을 하던 낙동강 수로를 장악하여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켜 일본군의 후퇴를 가져온 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대구권역의 의병도 시기별로 관군화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으로 강화회담 시기에도 대구권역은 일본군을 추격하여 주둔한 명군과 조선군의 군량 조달과 국가 군사재정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때문에 대구권역의 주민들은 다른 지역의 민들보다 많은 피해와 부담을 졌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 지역민들은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대구권역의 낙동강 유역에 석문산성 등을 축조하여 방어를 강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유재란 시기에도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위한 공격로로서 대구권역의 화왕산성과 고령 부근 전투가 있었지만관군화한 곽재우 군의 수성과 인접 고을민들의 참여로 화왕산성을 수성할 수 있었다그리고 고령에서는 鄭起龍이 활약하여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측면에서 본다면 임진왜란 전 시기에 걸쳐서 대구권역은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지속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전쟁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의병활동과 관군의 활약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지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5주제로 '대구지역 성리학의 특징과 임진란 의병활동'을 권상우 계명대 교수가 발표했다.
  대구지역은 성리학의 불모지로 인식되어 왔다그러나 최근 대구권의 성리학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불모지라는 인식도 희석되고 있다. 16세기 영남지방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퇴계학파가 형성되었고진주를 중심으로 남명학파가 등장하면서 성리학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두 지역의 학맥이 성행하면서 두 지역 이외의 지역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불모지로 전락하였다대구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대구는 안동과 진주의 중간지역에 위치한다그래서 대구지역을 퇴계학파나 남명학파로 분류할 수는 없어 보인다그러나 이는 대구권에 성리학자가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대구권이 성리학의 불모지라는 인식을 떨쳐버리는데 도움을 주는 성리학자가 있다면그가 바로 김굉필이다김굉필은 대구 인근지역인 현풍에서 활동하면서 조선 도학을 계승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그리고 16세기 중엽부터 퇴계학파나 남명학파와 같이 그 실체가 뚜렷한 학파는 아닐지라도 학단(學團)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대구권 성리학을 구축하였다
  대구권 성리학은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학단을 중심으로 대구지역의 현실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독특한 학풍을 조성하였다고 보았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대구권에서의 유학의 전개과정을 논의한 것을 보면, 대구권은 유학의 불모지나 주변이 아니다대구권에서는 16세기 중반부터 유학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유학적 이념에 근거해 창의하였으며그리고 의병활동에 참여한 경험은 대구 유림이 학문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그래서 대구 유림은 임진왜란 이후에 한강 정구에 從遊하면서 성리학을 한 층 더 성숙된 단계로 올려놓았다대구 성리학의 연원은 환원당 김굉필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김굉필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위기지학은 상향하여 안동에서 퇴계학으로 꽃을 피웠고하향하여 진주지역에서 남명학으로 우뚝 솟았다그리고 두 학파는 한강을 통해 대구로 다시 유입되어졌다그래서 대구 성리학은 김굉필에 근원을 두고 남명학과 퇴계학의 융합된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그래서 대구성리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내용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대구유학은 일상에서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다.
둘째대구유학은 조선 성리학의 源流와 合流의 두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셋째대구유학은 호국정신과 애민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마지막 제6주제로 '임진왜란기 대구지역 한강학파의 문학 활동'을  정우락 경북대 교수가 발표했다.
 본고는 임진왜란기 대구지역 한강학파의 문학적 대응을 고찰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여기에는 네 가지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시간적으로는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 일어난 임진년(1592)과 정유년(1597)을 전후한 7년간,공간적으로는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대구지역학파상으로는 李滉(退溪, 1501-1570)과 曺植(南冥, 1501-1572)이 세상을 떠난 후 낙동강 연안지역에 강력한 문파를 형성하고 있었던 鄭逑(寒岡, 1543-1620)와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한강학파분과 학문적 측면에서는 전통시대 넓은 의미로서의 문학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한강학파는 임진왜란기 대구지역에서 강력한 문파를 형성하고 있었다이들은 초기대응의 미숙으로 위기로 치닫고 있던 이 지역에서팔공산을 거점으로 하여 의병을 일으키며 구국의 대열로 나섰다고 했다.
  한국문학은 험난한 경험을 통해 더욱 정채를 발했다특히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이 겪은 최대의 시련이라 할 터인데이를 거치면서 자신의 전쟁체험을 기록과 형상의 방식으로 표출하기도 하고이를 통해 민족적 현실을 새롭게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기도 했다이 과정에서 물론 유학에서 제시하는 평화의 논리를 발견하기도 했다충효를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이들은 위기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이에 대한 극복의 갈망은 이들로 하여금 창의토적의 선봉에 설 수 있게 했다본고는 이러한 사실을 의식하면서 대구지역의 한강학파가 지닌 전쟁체험에 대한 기록과 그 형상을 문학적 측면에서 다룬 것이다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대구지역은 김종직 학단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파의 성장이황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의 자장 속에서 한강학파가 성립되었다.
둘째서사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