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경남 남해문화원 방문과 충무공 유적지 참배 2012-02-27
2012년 2월27일(월) 오전 11시30분, 류한성 수석부회장과 이천용 사무국장이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문화원 방문과 충무공 유적지를 을 방문하고 참배 했다.


훈풍이 부는 남해 바다와


들판엔 벌써 봄이 오고 있었다.


남해문화원을 방문해


이호균 남해문화원 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이호균 남해문화원 원장과 조혜연 사무국장에게 본회의 활동사항과 1832년(순조32)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한 곳에 단을 세워 사제관을 보내 치제케했다는 기록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충무공 단소 치제(제사)는 10월11일(목) 오전 11시 봉행하기로 논의 후 결정 했다.  


'이순신 영상관'이 있는 '이충무공 유적지'를 찾았다.


입구에서 남해문화원 홍혜연 사무국장이 지도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이락사를 찾아 들었다.


 "순조 32년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가 비문을 짓고 형조판서 예문관제학 이익회가 쓴 비와 비각이다이후부터 거성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이 사우를 이락사로 부르고 있으며사적 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조 32(1832)에 왕명에 의해 충무공의 8대손인 통제사 항권이 이곳에 유허비와 사우를 세웠다. 이 비문엔 제갈공명은 병으로 죽었으나 은 전쟁하다 죽었다공명이 죽자 촉나라는 위태로워 졌으나 은 죽었어도 나라가 에게 의지하였기로 이 역시 유감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끼친 공렬(功烈)의 은덕이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라고 써 있다.
(1772(영조 48) 115일 임진 3주갑, 1832(순조 32 임진) 4월 1일 4주, 1892(고종 29 임진) 5월 24일 5주갑, 1952(이승만 정부) 5월 25일 6주갑 이렇게 60년이 되는 임진년마다 나라에서 도백(관찰사)을 보내 치제케 했다.)  상기에서 보다시피 4주갑(240년) 때 세우고 치제관을 보내 충무공을 기린 곳이다.


당시 노량해전을 조망할 수 있는 첨망대에 올라


설명을 들었다.


당시 포성과 북소리는 고요한 밤을 일깨우고 기습공격을 당한 왜선은 당황하여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대열을 갖추어 결사적인 반격을 가해왔다. 밤새도록 치열한 격전이 계속되었다. 우리 병사들은 총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칼과 창을 들고 적선에 뛰어 들어 적병을 무찌르고 불을 놓았으며, 불붙은 나무 조각을 왜선에 던져 불태우고 또 깨뜨려 버렸으니 해상은 불타는 왜선과 죽은 왜병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이와 같은 공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왜선은 사기가 저하되어 관음포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칠 물길이 이미 우리 함대에 의해 막혀 있음을 알았다. 궁지에 몰린 왜선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반격전을 전개하였으므로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공과 진린은 서로 도우며 혈전을 거듭했다. 이때에 함상에서 지휘하던 공은 적탄에 맞아 쓰러지셨다. 공은 쓰러지는 순간까지 그가 염원하던 구국의 일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98년(무술년) 11월 19일(음력) 새벽으로 공의 나이 54세였다. 
저멀리 광양과 여수시를 잇는 1592m 길이의 '이순신 대교' 건설 모습도 보이고 


바로 앞에 보이는 순국지점도 보았다.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관리동을 찾아  


강광수 충렬사 관리소장의 안내로 관리동 위쪽에 있는 충렬사를 예방했다.


충무공 사당에 참배를 드렸다.


우암 송시열이 짓고동춘당 송준길이 쓴 '남해 충렬사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충무공의 유해를 잠시 안치했던 사당 뒷편의 가묘도 가보았다.


충무공 유적을 찾아 설명을 듣고 참배하다 보니, 해는 뉘엿뉘엿 붉은 빛을 띄며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