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29일(금) 오전 10시30분,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 이종천 회장, (사)차인연합회 박권흠 회장, 정정공·풍암공 종회 이종민 회장, 고려대법대 57학번동기회, 해평윤씨오음윤두수선생후원회 회장 윤금영, 충익공박동량선생 후원회 회장 박철우, 고씨중앙동문회 회장 고봉림, 안동하회마을 보존회,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당선인 강성원, 전 법무부장관 김경한, 한국국학원진흥원 김병일 원장, 해주정씨대종친회 정석준 회장 등의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전국각지의 105개 후원회와 내외 귀빈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다.
정치와 외교 '동아시아 국제전쟁, 임진란'이란 타이틀의 국제학술대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 걸리고
400석 좌석이 만석을 이룬 속에
류한성 수석부회장의 사회로 국민의례를 마친 다음
이종남 회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임진란 7주갑 기념 문화·학술대제전의 일환으로 개최된 제1차 학술대회에 경향각지에서 왕림하시어 자리를 함께하신 내외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린다"고 말하고, "지난 6월2일 안동하회마을 충효당에서의 국가제향인 사제사 봉행에 이어 낙동강변 탈춤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임진란 7주갑 기념 문화·학술대제전의 국가기념 기념식을 전 국민의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행하고, 6월19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임진란 유물 순회특별기획전 개막식" 소식과 "1952년 임진란 6주갑 때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주제로 서울 충무로 광장에서 임진란 6주갑 기념 국난극복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던 사실과, 본 문화·학술대제전에서는 4차에 걸쳐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이를 통해 임진란의 역사적 의미를 학술적으로 조명하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동안 한계로 지적되었던 주제의 편중·논의의 일회성을 탈피하기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외교 등 전쟁의 여러 측면을 포괄하려고 노력했으며, 임진전쟁을 통해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던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외교 문제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하고 논의를 집중한 연후에 공유하는 합의가 도출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번 제1차 학술대회에서는 임진전쟁 당시의 정치·외교·군사 문제를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 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자국의 관점에서만 연구를 진행해왔기 때문에 서로의 역사성을 공유하거나 또 다른 점을 인정하는 작업은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임진전쟁 7주갑 기념 학술대회는 그런 점에서 한 단계 진전하여 역사연구의 전환점 내지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연구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며, 임진전쟁을 국제전쟁으로 자리매김하고 보다 넓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재조명 하기위한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끝맺음 했다.
이용태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은 축사에서 징비록에 관한 내용과 서애선생과 충무공과의 두 분이 한 날에 파직과 순국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에 대하여 문제와 대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 3개국어로 동시 통역하는 가운데
第1主題로 Violence, Trade, and Impostorsin Korean-Japanese Relations, 1510-1609(朝日關係에서의 暴力, 貿易 그리고 사기꾼들, 1510-1609 ) 주제로 케네스 로빈슨(Kenneth R. Robinson /日本 國際基督敎大學 敎養學部, 東北亞歷史財團 招聘學者) 교수가 발표 했다.
"침략에 대비한 직접적인 준비는 1591년 봄, 히데요시가 북서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의 부대에 명령을 내렸을 때에야 착수되었으며, 히데요시가 무시한 한 이유로는 교토 정부와 주마다의 관계의 차이와 16세기 초 서부 지방, 특히 대마도와 하카다에 대한 관료의 재배치가 있다. 진취적인 이들은 1512년 이후 무역선과 무역규모를 회복시킨 것에 대해 막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가짜 마구와의 교류는 비슷하게 조선정부가 일본 내 상대와 거리를 주게 하였고 1587년 히데요시가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로 자신을 소개하였을 때 조정내에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했다.
"16세기 후반에, 이전부터 조선 조정은 일본의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가짜 무역에 참여한 이들에게 의지해왔으며, 일본 정부와의 직접적인 소통단절과 대마도를 넘어 하카타나 교토에 관료를 보낼 관심이나 필요가 없었던 것은 조선 왕들과 대신들이 일본 내 정치나 전쟁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고도 했다."이러한 이유들은 물론 대마도 관리들에 의해 완화되었지만 히데요시 요구의 뻔뻔함은 선조와 대신들이 히데요시를 대변한 대마도와 하카타인들의 신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1590년 겨울은 조선조정이 대마도를 넘어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너무 늦은 때였다"고 했다. 그리고 "1591년의 봄은 조선조정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기 너무 늦은 때였다"고 했다.
第2主題로는 '壬辰亂 時期 朝鮮의 軍事力'으로 鄭海恩 韓國學中央硏究院 先任硏究員이 발표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조선의 군비 증강에 대한 명군 지휘부의 입장이다. 명군 지휘부는 선조를 여러 방면으로 압박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이 하루속히 자강을 이루라는 요구였다"고 했다. "이여송을 비롯한 송응창은 군비 증강이 되지 않으면 명군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선조가 禪位하겠다고 했던 계기 중의 하나가 바로 명군 지휘부에서 군비 강화를 촉구하면서 힐책한 일이었다. 이 사실은 임진왜란기 명군 지휘부가 요청한 군사력 증강의 배경에는 명군 지휘부의 이익과 명조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도 했다. 발표자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임진왜란기 조선의 군사력은 물리적인 측면 이외에 조선과 명의 관계도 적극적으로 거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기와 전법의 도입에는 ‘先進’이라는 맹목적인 관점이 아닌 조선의 이해와 선택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무기와 전법의 도입에서 조선이 겪었을 과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면 임진왜란기 조선이 처한 상황을 풍부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군사력을 이해하는 데에도 일조를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했다.
第3主題는 '萬曆壬辰戰爭中的南兵(萬曆壬辰戰爭中의 南兵)'로 양하이잉(楊海英 中國 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硏究員) 교수가 밮표했다.
《당나라 장군 서첩》에서 남병을 말하다에서 “임진전쟁기간, 동정(東征)군(东征军中)내에 군율을 잘 지키는 우수한 자들은 대부분 남병(南兵)이었다. 예를 들면 오유충(吴惟忠)이 조선의 국왕에게 말하기를“소인이 인솔한 절강, 복건병사는 당시 척총병이 추천한 것이고 바로 소인의 문생이다. 만약 소인이 잘 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십시오.” 엄격한 군율에는 철 같은 규율약속 이외에도 장병들의 자아희생라는 도덕 적 감응력(道德感召力)의 영향(影响)에 근거하였다했다. 임진전쟁과 남병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로서 첫째 - 임진왜란 전쟁기간의 남병(南兵)는 광범위한 측면과 좁은 의미에서의 내용(涵义)을 가지고 있다. 둘째 - 동정명군(东征明军)중 가장 전투력이 있는 군대는 “남병”이었다. 셋째 - 남병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중시하였다. 넷째 - 만력 임진왜란 전쟁 중에서 중·일 사이에는500여년의 역사적 겨룸의 시작점이다. 만력임진전쟁에서 중국은 막대한 댓가를 치르고 물러났다. 일본은 패해서 돌아갔고 그 후 300년을 부진하여 확장의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300년 후 임진전쟁의 실패 측인 일본은 다시 궐기(崛起)하였다. 명치유신(明治维新)을 통하여 일본은 실력을 증강하여 유신개혁에서 실패한 청나라 말 중국과 다시 힘겨루기를 시작하여 승리를 이루어 낸다. 우선 1910년 경술년에 조선을 삼켜버리고 만력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간 이루지 못한 숙원을 실현하였다. 더 나아가 중국의 동북에 침입하여 중국에서 전면적인 전쟁-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할 때 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만약 중국인민이 8년간의 피를 쏟으며 싸우지 않았더라면 또한 세계 반파시스 세력의 힘을 얻지 못했다면 일본은 중국의 녕파(宁波)를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꿈이 실현될 수도 있었다.때문에 만력임진전쟁은 중일 양국이 500년의 역사적 힘겨루기의 시작점 이였고 임진은 일본의 실패한 아름다운 꿈이 었지만 1910년 경술은 임진이 성공했다는 증거물이라고 결론지었다.
第4主題는 '壬辰亂 時期 朝鮮의 對明 外交關係'로 韓明基 明知大 史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임진란 이전 조선은 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임진란의 발생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명의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고구려의 嫡子’로 인식될 만큼 강한 나라였던 조선은 일본에 대책 없이 밀렸다. 서울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평양, 그리고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내몰리게 되었던 조선은 결국 명에 구원을 요청했다. 명은 애초 이 ‘고구려의 후예’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군대가 들어오면서 ‘적절한 거리’는 없어졌다. 조선 또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적절한 거리’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조선의 내부 사정은 명군 지휘부에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외교란 국가와 국가 사이의 대등한 교섭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명군이 들어온 상태에서 조선이 명과 대등한 외교를 벌인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명군의 참전 이전에는 倭情과 戰況을 보고하고 請兵과 請糧외교, 나아가 渡遼를 허용해 달라고 하면서도 조선 나름의 자주성을 염두에 두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다소나마 존재했다.하지만 참전 직후에는 모든 것의 주도권이 명에게로 넘어갔다. 명군을 전장으로 이끌고, 지휘관을 접반하고, 그들에게 給糧, 運糧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을 노출시키면 곤란했다.
이제 명군 파병을 계기로 ‘조선 문제’는 명 조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조선에서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 병력을 얼마나 남겨줄 것인지의 여부 등등이 심각한 파장을 남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고 장기화 되면서 조선 내정에 미치는 명의 外壓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이―조선의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이나 의사를 무시한 채―강화협상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면서부터 조선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바야흐로 “번국의 내정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책봉-조공 체제’의 불문율이 흔들릴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임진란 당시 조선 외교의 목표는 ‘상국’ 명의 군 지휘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조선이 원하는 일본군 격퇴와 復國 달성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자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조선의 여력이 고갈되어 武力을 거의 전적으로 명군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선이 벌일 수 있는 ‘외교’의 내용이란 거의 없었다. 그것은 결국 명군 지휘부에 대한 접반. 그리고 그 접반의 내용은“어서 빨리 전진하여 決戰하라”는 종용, 그리고 그 같은 종용을 하려면 최소한 명군에게 필요한 양초를 제공해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명은 조선에게 몹시 ‘버거운 존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정유재란 당시 명군 經理 邢玠는 심지어“일본보다 조선이 더 문제”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여 빈축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를 비롯한 조선 지배층은 국난 극복의 원동력을 ‘명군 덕분’으로 돌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의주로 피난하여 명군을 불러오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扈聖功臣)들을 국난극복의 元勳으로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李舜臣, 郭再祐, 權慄 등 일본군과 직접 싸우며 공을 세운 宣武功臣들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 임진왜란 극복의 모든 공로를 명군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다.
그것은 조선 스스로 ‘順夷’로 순치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조선은 명의 도움에 의해 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겪었던 댓가 또한 만만치 않았다. 명의 외압은 가중되었고 그 과정에서 명군이 자행하는 민폐 또한 심각했다. 나아가 명에 대한 실제적 의존도와 의존심리가 높아지면서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여부가 전쟁 이후 정국의 흐름에도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선조가 전쟁 극복의 원동력을 철저히 명의 원조 덕분으로 치부하면서 “명군의 참전이 조선을 살렸다”라는 공식적인 기억이 만들어졌다. 나아가 그 명군을 불러오는데 공을 세운 扈聖功臣들이야 말로 ‘전란 극복의 元勳’이 되었고 그 정점에 있는 선조는 ‘구국의 군주’로 자리 매김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임진란 이후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은 조선에게‘재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오랑캐’ 누르하치의 建州女眞이 崛起하여 명에 도전하는 상황이 출현했을 때―명이 베푼 ‘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는 崇明意識이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던 조선은―조선은 결국 明이 추구하는 以夷制夷策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아가 扈聖功臣的인 성격이 강했던 신료들이 1623년 仁祖反正을 일으켜 宣武功臣的인 속성이 강했던 光海君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이후 조선의 外交는 더욱 親明의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요컨대 임진란이 ‘원죄’로 작용하면서 丙子胡亂이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第5主題로는 '壬辰倭亂 時期 朝鮮軍의 活躍' 부주제로 -戰爭 全般의 흐름을 中心으로-를 李敏雄 海軍士官學校 敎授가 발표했다.
올해 2012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7주갑,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강한 역사 인식을 남기고 있다. 그 이전부터 이웃나라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이 전쟁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제하고, 먼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초기 4개월간은 조선군의 수세기였다. 처음 침입을 당한 부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은 육군과 수군의 지휘관들이 임지를 떠나 도주하는 등 제대로 방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산 지역에서는 끝까지 임지를 지키고 순절한 수군첨사 2명과 동래부사 등이 있었다. 특히 다대포첨사 윤흥신은 조선군 중에서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거둔 주인공이었다. 또한 조선 수군은 5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 이어진 4차례 출전과 1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육전과는 반대 상황을 연출하고,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략을 방지한 것은 물론 전체 전국의 전환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연안성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이고 함경도로부터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점령당했던 많은 지역을 자력으로 수복해 나갔다. 이 때문에 계사년(1593) 봄, 일본군은 결국 한성을 포기하고 영남지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어느 정도 되풀이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세기 중반에도 임진왜란 시기와 흡사한 전쟁 경험을 하였다. 전쟁은 비극이고, 그 엄청난 피해는 국민에게 간다. 우리나라의 운명을 타국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역사는 두 번으로 끝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맺는다.
마마지막 第6主題로 '壬辰倭亂期의 講和交涉과 加藤淸正'으로 金文子 祥明大學校 歷史콘텐츠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7년 중 실제 전투기간이 1년 6개월이였고, 나머지 5년 1개월은 사실상의 ‘휴전’ 상태에서 일본과 조선, 일본과 명 사이에서 강화교섭, 즉 외교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유키나가가 추진하고 있는 강화교섭의 실체를 알아내고 히데요시에게 정확한 교섭내용을 전달하여 4차례에 걸친 회담을 통해 풍신수길의 의도를 확인하였고, 유키나가와 심유경간에 진행되고 있었던 강화조건이 조선과 명에 알려져 강화교섭이 결렬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 히데요시가 4년동안 진행되어 왔던 강화교섭을 파기한 것은 자신을 일본국왕으로 임명된 것을 알고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조선지역에서 전부 철수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는 영토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임과 동시에 조선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전부 철수하게 되면, 그나마 무역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려 했던 목적마저도 이룰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총동원해서 감행해왔던 침략전쟁이 수포로 돌아가고, 국내의 정세마저도 불안한 가운데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돌파구로서 재침략을 감행하였다는 점이다. 히데요시는 일본의 승리와 자기의 관대함을 국내에 선전하기 위해서 다시 재침을 결심한 것이고 조선을 공격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전쟁 발발의 원인을 조선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자가 일본에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선왕자가 來日하지 않았다던가, 조선통신사 늦게 도착했다던가, 신분이 낮은 관리들이 왔다던가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전쟁을 다시 개시하였던 것이라고 갈파했다.
종합토론에 들어 갔다. 좌로부터
발표 Kenneth R. Robinson 日本 國際基督敎大學 敎養學部, 東北亞歷史財團 招聘교수, 토론 韓文鍾 (全北大 史學科 敎授), 발표 鄭海恩 (韓國學中央硏究院 先任硏究員) 박사, 討論 李俊甲 (仁荷大 史學科 敎授), 발표 楊海英 (中國 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硏究員) 교수, 討論 : 盧永九 國防大學校 敎授, 座長 : 閔德基 淸州大 史學科 敎授, 발표 金文子 祥明大學校 歷史콘텐츠學科 敎授, 발표 韓明基 明知大 史學科 敎授, 討論 : 許泰玖 奎章閣 學藝硏究士, 발표 李敏雄 海軍士官學校 敎授, 討論 : 金鍾洙群山大 史學科 敎授.
韓文鍾 全北大 史學科 敎授는 토론에서 역사성을 도외시(직역)한 번역이 많아 출간할 때는 반드시 수정할 것을 당부했다.
종합토론을 마치고 본회 회장단과 기념촬영
에필로그
참가들이 방명하기 위해 길게 줄서있다. 방명록이 3개 비치됐음에도
류한성 수석부회장과 이범 덕수이씨 대종회 부회장, 이종석 덕수이씨 충무공파 부회장의 인사
이종남 회장이 손님 맞이
류영하 서애선생 종손과 이종남 회장의 인사
6시간 동안 동시통역을 담당했던 통역실아래 호국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하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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