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2년도 제2차 국제학술대회 개최 성료 2012-08-27
2012년 08월25일(토) 오전11시 30분, 담양 전남도립대학교 대강당에서 제2차 국제학술대회가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 한국발명진흥회장, 칠원윤씨 대종회 윤윤수 회장[(주)휠라글로벌 회장], 한음상공파종회 이명환 회장, 충익공박동량선생 후원회 회장 등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최형식 담양군수, 문경규 제봉기념사업회 회장 등이 자리해 주고 관계자 와 관심 있으신 분들 400여 명이 참석해 연구발표를 들었다. 


전남도립대 정문에는 사회와 문화 '전쟁의 혼란과 새로운 희망'을 대주제로 있었는데 그 현수막이 내 걸렸다.


입추의 여지 없이 꽉찬 가운데


윤성로 감사의 시회로 


국민의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올린 후 


류한성 수석부회장은 이종남 회장의 인사말 대독에서 "금년은 임진전쟁이 발발한지 7주갑이 되는 해"라고 강조하고"지난 62일 안동하회마을 충효당에서 문충공 서애 류성룡선생의 국가제향인 사제사를 봉행하고 이어서 안동탈춤 야외공연장에서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 대제전의 거국적인 국가 기념식을 전 국민의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거행하고, 619일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순회특별기회전 개막식을 거행했으며, 1952년 임진란 6주갑 때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주제로 충무광장에서 임진란 6주갑기념 국난극복대회가 개최 됐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 했다"고 했다. "저희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 대제전의 행사전반을 홍보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선일보사의 협조로 6주갑기념행사 사진을 찾아6주갑 기념행사의 내용을 정리하게 된 점과, 하마터면 실종될 뻔했던 국가제전의 광범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정부로부터 방대한 규모의 국가예산을 지원받아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 대제전을 거행하게 된 것은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문화·학술 대제전의 핵심이 되는 중요행사의 하나가 국제학술대회이기 때문에,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는 4차에 걸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했다. "지난 6월29일 서울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임진란 당시의 정치·외교문제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하여 제1차 국제학술대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고 말하고, "금일 오전 추성창의기념관에서 국기제향인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과 함께 순국하신 여러 열사님들에 대한 사제사를 봉행하고 연이어 이곳 전남도립대학교 대강당에서 사회·문화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하여 제2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 또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4차에 걸쳐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의 성과물과 그간 학계에서 논의의 중심이 되었던 임진란 관계 논문들을 총정리 하여 임진란 연구총서를 편찬하여 발간하려는 점도 밝혔다. 이 또한 획기적이고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고 했다. 
"본학술대회에서 주제논문을 발표하시고 토론해주실 국내외 여러 학자님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에 깊이 감사드리고,  더욱이 장소와 제반 편의를 제공해주신 구충곤 총장님을 비롯한 학교 당국자에게 감사드리며 경향각지에서 왕림하시어 여기 자리를 함께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로 끝맺음 했다.


첫번째로 '辰亂 時期 降倭 投降背景과 役割'을 제1주제로 韓文鍾 全北大 史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향화왜인은 조선왕조의 덕을 崇慕하여 조선에 귀화한 왜인이다이들 중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왜구와 임진란 시의 왜병이 조선에 투항하거나 귀순한 항왜가 있으며생활고 등을 이유로 스스로 조선에 도항하여 향화한 왜인도 있었다또한 일본에 거주하면서 조선의 관직을 제수받은 수직왜인도 있었다. 특히 임진란 중에 조선에 투항하거나 내응한 항왜가 많게는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이들 항왜는 일본군과의 싸움에 참여하였으며왜병을 초유해서 투항시키기도 하고,조총과 화약의 제조법 및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하였다또한 북방에 분치된 항왜는 오랑캐를 방어하거나 토벌하는데 참여하였다"했다.
"임진란 시기 왜병의 투항은 멀리는 조선초기의 왜구에 대한 회유우대책에서 찾을 수 있다그러나 직접적인 투항원인은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식량의 부족과중한 노역과 혹독한 취위로 인한 병사들의 고통將倭의 포악함과 의 과중왜병들의 일본 국내에서의 불합리한 생활모순오랜 전쟁으로 인한 전쟁 기피 등이 조선의 항왜 초유책과 우대책과 결부되어 있었고, 정유재란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다시 항왜가 속출하였으며, 특히 加藤淸正 휘하의 부하들이 많았다. 항왜가 투항해 온 지역은 주로 전라도의 남원과 경상도의 의성, 의령, 경주, 거창, 동래, 林郞浦 등이었다. 특히 정유재란기에 경상도지역에서 항왜가 많이 나타난 이유는 일본군이 주로 이 지역에 주둔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이었다"했다. 
"임진란 시기의 항왜의 역할 및 활동을 살펴보면첫째경상도 등지에 분치된 항왜는 주로 정유재란기에 황석산성 싸움명량해전정진 싸움남원성 싸움사천싸움 등에 참가하여 많은 활약하였다둘째조선에서는 항왜를 일본 군영에 잠입시켜 일본군의 정세를 정탐해오기도 하고 항왜를 초유해 오기도 하였다셋째조선에서는 항왜를 통해서 조총의 제조와 사용법,염초의 채취 및 화약의 제조법 등 여러 가지 기술을 전수 받으려고 하였다그 결과 1597년경에는 조선에도 왜인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난 조총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또한 검술이 능한 항왜에게 兒童隊중 한 부대를 맡아 조련하도록 하였다넷째함경도나 평안도 등의 양계지방에 분치된 항왜는 胡狄을 방어하고 토벌하는데 활용하였다.  "임진란 시기의 수직왜인은 첫째, 1597년과 1598년에 투항하여 관직을 제수 받은 자가 가장 많았으며초직으로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둘째, 1594년부터 1596년까지의 수직왜인은 조총의 제조 기술이나 사용법화약제조법 등의 기술이 있는 자들로주로 사정을 제수 받았다셋째要時羅 등 通事倭에게 관직과 은을 주고 매수하여 이들을 통해 적정을 탐지하려고 하였다넷째수직왜인 중에는 조선정부로부터 성과 이름을 하사받은 자가 많았다다섯째平調信平景直 등 6명은 임진란이 끝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과 통교하였다이는 조선 초기에 왜구가 투항하여 수직왜인이 되었다가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 통교왜인으로 다시 조선과 통교한 사례와 유사하다"고 한다.



 第2主題로 '壬辰亂 時期 朝鮮通信使의 被擄人 刷還과 그 限界'를 孫承喆 江原大 史學科 敎授가 발표했다.
"임란정유재란 시기에 일본으로 피랍되어간 조선인의 쇄환문제는 국가중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1604년 사명대사의 탐적사에 의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강화를 요청하는 대마도사절단에 의해 주도되었다그 후 1607년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3차례의 회답겸쇄환사와 3차례의 통신사 등 총 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현재 조선피로인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일본학자는 2-3한국학자는 적게는 10만 전후많게는 40만까지 추정하고 있다또한 조선피로인의 거주지역도 조선침략의 선봉장이었던 大名들의 출신지역과 거리상 구주지역에 제일 많았고그 외에 조선사절의 사행로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 분포되어 있었다이들 피로인 가운데 조선으로 귀국한 사람은 6천명(5,667)을 넘지 않으며이 가운데 대마도사절에 의해 송환된 피로인은 768명이고나머지는 探賊使 및 회답겸쇄환사에 의해 4,885명이며통신사에 의해서는 14명만이 조선에 돌아왔다
이처럼 피랍인에 비해 쇄환인원이 적은 이유는 우선 일본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이었다막부 장군은 피로인 본인이 귀국을 원하는 경우는 모두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돌려보내도록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명령을 했으나이것은 형식적인 것일 뿐실제로는 각 지역에서 많은 방해가 자행되었다뿐만 아니라 倭主에게 억매에 있는 피로인의 경우는 倭主의 허락이 없으면 귀국이 불가능했다따라서 이를 피해 탈출하는 경우도 속출했으며시간이 흐를수록 피로인들에 대한 倭主들의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피로인 자신도 10세이하의 어린 나이에 피랍된 경우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조선의 실정도 모르기 때문에 거의가 귀국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일본의 생활에 익숙해진 경우예를 들면 처자가 있거나 재산이 있어서 그 삶이 안정된 경우는 귀국을 원치 않았다뿐만아니라 조선에서 피로인을 쇄환한 이후 너무 박대한다는 소문과 본국으로 돌아가도 의식을 의지할 데가 없어 생활이 어려우므로 軍兵이나 남의 奴隸가 될 것이니차라리 일본에서 지내겠다고 하면서 귀국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경우를 예상하여 1604년 탐적사 유정일행이 피로인을 쇄환했을 때에도 모두 免罪免賤免役의 특전을 내린 적도 있었고그러한 내용을 관아에 알리는 등 開諭文을 使臣便에 주어서 널리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이러한 내용이 흐지부지하게 되어 귀국 후의 대우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난무하게 되었고그 결과 귀국을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3주제로 壬辰亂(文祿慶長의 役)에서 小西行長의 動向(壬辰戦争における小西行長動向 (発給受給文書から)을 도리즈 료지(鳥津亮二) 日本八代市歷史博物館 學藝員이 朴孝淑 朝鮮大 日本語科 招聘敎授의 통역으로 발표했다. 
"小西行長은 秀吉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해상 수송이나 선박병량 확보 등 바다의 병참 후방 지원을 담당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지위를 상승시킨 관료적 무장이다그리고 앞에 서술한 것처럼 九州 북부 大名의 통괄 및 연해 경비의 감독역을 秀吉로부터 명받게 되고宗氏에 대해서도 秀吉의 의향을 준수하게 하기 위한 감독적 입장이 되었다그리고 1588년 윤5월에는 肥後 남부의 영주로 임명된다秀吉에 대해서 行長은 九州 전체를 자신의 정권 뜻대로 기능시키게 하기 위한 (九州중앙부에 집어넣은 문설주[]이고 行長에 대해서 秀吉은 절대적인 존재였다따라서 行長은 秀吉의 의향을 확실하게 실현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기본적 사명 하에서 행동하게 된다그리고 그 역할은 결과적으로 壬辰戰爭을 통해서도 변하는 것이 없었고본고에서 검토한 것처럼 小西行長은 강화 교섭뿐만 아니라 秀吉의 의향의 전달역 및 통괄역 등 마치 현지 일본 諸將의 중추로서의 입장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본고에서는 기본 동향을 추적하는 것이 전부로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조잡한 검토에 그치고 말았다하나하나의 사료를 충실하게 검토해 가는 것이 이 임진전쟁의 사실 해명을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본고가 그 조그마한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겠다"했다.




4主題로 '壬亂日記의 여러 類型과 戰爭을 겪은 兩班들'으로 金炫榮 國史編纂委員會敎育硏究官이 발표했다.
"조선시대 
500년을 종래에는 임진왜란을 획기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시기구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근래에는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 두 개의 시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기중기후기 세 시기로 나누어 시기구분을 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수용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80년대에 간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