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06일(금) 오전10시에 경주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가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명예회장 이종남, 경암공 김응생선생 후원회,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제35대 총학생회장 문명화, 매헌공 권사민선생 후원회, 구암공 이준선생 후원회, 무의공 박의장장군 후원회, 학교법인 육주학원 이사장 박병립, 청와공 이경한 선생 후원회, 두촌공 이팽수선생 후원회, 망조당공 서인충장군 후원회, 무심당 주사호선생 후원회, 목사공 박홍장 장군 13대 주손 박신일, 영천의병대장 창대공 정대임장군 후원회,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 고운최국제교류사업회 회장 최병주, 경주김씨 직할종친회 회장 김하술, 육의당 최계종선생 후원회,옥구이씨 성인당 희룡선생 후원회, 경주손씨 문중, 정무공 최진립 선생 후원회, 수졸당 이잠선생 후원회, 운암공 최봉천선생 후원회, 영천의병대장 강민공 정세아 문중, 칠원윤씨 대종회장 윤종진, 칠원윤씨 칠계군종회 회장 회장 윤성현/칠원윤씨 헌민공 중호윤탁연선생후손문중, 월암공 김호장군 후원회, 월봉공 김수 선생 후원회, 부암공 백이소선생 후원회, 사단법인 임란호국영남충의단보존회 이사장 곽동협, 경주이씨대구・경북 화수회 이현우,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선생 기념사업회, 한음 이덕형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이명환,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 후원회, 한국재정정책학회 회장 유태현, 사단법인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 충의공 권응수장군 후원회, (사)신라역사문화선양회 이사장 김은호, 기계유씨 충목공 유홍선생 후원회 유완식, 경주김씨 중앙종친회 김용환, 경주상공회의소 회장 김은호, 청주정씨 백곡정곤수선생 후원회 정만용, 문경공 류운용선생 후원회, 문충공 류성룡선생 후원회, 충렬공 송상현선생 후원회, 충무공 이순신 장군 후원회, 해평윤씨 오음윤두수선생 후원회, (사)학봉선생기념사업회 등의 화환이 진열되고,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주 웨딩파티엘 1층에서 성대히 열렸다.
경향각지에서 입추의여지 없이
참석한 가운데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 이어
본회 김양조 운영위원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루한성 회장은 개회사에서 "이곳 경주지역은 임진전쟁에서 경주성 복성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각종 전투로 점철된 우리 임진란사에서 영원히 기념될 역사의 현장이라"고 전제한 뒤, "이 역사의 고장 천년고도 경주시에서 개최하는 “경주지역의 임진란사 연구”를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편안히 따듯하게 맞아주시는 경주시민 여러분과 재정지원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최양식 경주시장님과 권영길 경주시의회 의장님・의원님과 각급 기관장님들 나아가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원님들께서 다함께 자리를 하시어 역사의 한장을 장식하는 고귀하고 엄숙한 자리에서 본회를 대표해서 머리 숙여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본회는 금년 4월27일 이곳 경주시 서라벌회관에서 최양식 시장님을 비롯해 시의원 여러분 각급 기관장님・경주시민 여러분을 모시고 본회 임원들과 대의원 여러분들이 임석하신 가운데 2015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한 뜻 깊은 자리에서 본인이 회장으로 선출되어 회무를 집행해오고 있으며,.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는 2012년 壬辰年에 거행한 壬辰戰爭 7周甲記念 文化・學術大祭典에서 4回에 걸쳐 國際學術大會를 개최했다"고 했다.
"이 學術大會에서 壬辰亂史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고서 2014년부터는 壬辰亂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國內의 여러 地域들을 선정하여 학술적으로 조명하여 전체의 壬辰亂史 내지 韓國史를 올바르게 정립하여 임진란사 연구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져 노력하고 있으며, 本會는 대구광역시에서 大邱地域을 첫 번째 대상지역으로 선정하여 2014년 10월31일 ‘大邱地域의 壬辰亂史 硏究’라는 大主題로 學術大會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연이어 2015년 2월12일 영천시에서 ‘永川地域의 壬辰亂史 硏究’라는 大主題로 성황리에 學術大會를 개최하고 다시금 대구광역시에서 ‘제2차 大邱地域의 壬辰亂史 硏究’라는 大主題로 세 번째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가"고도 했다.
"네 번째 연구대상지역으로 이곳 경주지역을 선정하여 ‘慶州地域의 壬辰亂史 硏究’라는 大主題로 대망의 거점별 學術大會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거점별로 개최한 임진란사 연구의 성과물들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정리하면 한국의 임진란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따라서 한국의 임진란사를 집대성하는 것이야말로 본회에 부여된 본연의 책무라"고 했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제반 양상은 국제전 임진전쟁 당시와 대송소이하다고 생각한고 피력하고,. 임진란을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많은 시사점과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고"도 했다.
"본회는 경주지역 학술대회를 개최한 이후 금년 말에 상주지역에서 ‘상주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2016년 구미시・문경시・봉화군・성주군・청도군・울산광역시 등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도 밝히고, 나아가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성과물을 중심으로 다음해에도 예산지원을 받아서 대구광역시에서 계회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가제 『경주지역의 인진란사 연구』라는 單行本으로 발간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초양식 경주시장님의 해외(폐루) 출장관계로 김남일 부시장님이 환영사를 했다.
경주시의회 의회운영위원회 박귀룡 위원장님이 축사를 했다.
경주김씨 대종회 김용환 총재는 축사에서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저희 경주김씨의 본향인 천년고도 경주시에서 개최하는“경주지역의 임진란사 연구”를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게 되어 무한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감개무량합니다.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2012년 임진년에 7주갑을 (420年)을 맞이하여 6월2일 안동시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4回에 걸쳐 지역을 달리하고 주제를 달리하면서 한・중・일 삼국의 학자들이 함께 학술대회를 통하여 임진전쟁에 대하여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노력한 점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져 합니다.
저도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부산시의 부산대학교에서 경제와 군사문제를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단체회원 대표자격으로 참석한 바 있습니다. 이런 학술대회에서 거두어 드린 성과물과 과거에 쌓아 올린 연구 축적물을 한데 묶어서 4권1질의『임진란 연구총서』 大作을 발간 배포하여 임진전쟁을 연구하는 연구자는 물론 정책 입안자 나아가 전 국민이 이용하고 탐독하는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2014년부터는 임진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국내의 여러 거점들을 선정하여 연구하는 거점별 연구 활동을 심도 있게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번째 연구대상 지역으로 이곳 경주지역을 선정하여 전국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해준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리면서 무한의 영광으로 생각합니. 이번 학술대회에서 알찬 수확을 거두셔서 학계는 물론 국가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시길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또한 우동기 대구광역시교육감 축전을 보내왔다.
"경주지역의 임진란사 연구를 대주제로 열리는 ‘2015년도 임진란사 학술대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임진란에 대한 학술적 조명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애쓰시는 귀회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
2부에서 제1주제로 '조선시대 경주지역의 학맥'을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실 실장이 발표했다.
이 글은 조선후기 경주지역 학풍의 추이와 그 성격을 짚어보는데 주안점이 있다. 신라 이래로 불교가 융성했던 경주지역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주자학적 풍토가 확산‧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에 손중돈‧이언적 숙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언적에 대한 이황의 경모심과 추양론은 16세기 이후 경주의 유림들이 퇴계학풍을 계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16세기 중후반 이후 경주유림들은 정구‧장현광‧조호익‧정경세 등의 석학들과 사승관계를 맺고 학문적 외연을 확대해 나갔는데, 특히 한강문인 이의윤의 학자적 삶은 회재학의 바탕 위에서 퇴계학의 수용한 경주지역의 독특한 학문풍토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헌문인 정극후‧권응생의 학자적 역할은 경주지역이 영남학계 주요 문파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8세기 이후 경주 유림들은 학봉학통의 갈암학파와 사우문인관계를 형성하며 학문적 결속력을 다졌는데, 양동 여강이씨 회재가문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같은 양동 출신이면서도 학문적 성향을 조금 달리했던 학인의 존재인데, 매호 손덕승이 바로 사람이다. 손덕승은 회재‧여헌학을 학문연원으로 하면서도 외가를 통해 기호학을 수용함으로써 매우 독특한 학자상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의 주류적인 학문경향인 ‘갈암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시선을 감추지 않은 것에서는 경주학풍이 지니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잘 녹아 있었다."고 했다.
제2주제로 '임란기 경주지역 지방관의 전쟁대응과 민의 전쟁체험'을 노영구 국방관리대학원 교수가 발표했다.
"경주 지역은 경상좌도의 여러 고을 중 가장 큰 도회로서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그러나 경상좌병사 박진과 경주판관 박의장이 이끈 조선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그해 가을 수복된 이후에는 일본군의 최대 근거지인 울산, 서생포의 일본군을 견제하는 조선의 주요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군은 여러 차례의 경주 일대를 공격하였으나 경주 지역 조선군과 의병의 저지로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진출이 좌절되었고 이는 임진왜란 전체 전국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가는데 있어 경주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임진왜란 시기 경주 지방관의 전쟁 대응과 지역 사회의 동향에 대해 전쟁 기간 내내 경주판관과 부윤이었던 朴毅長의 戰爭指導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아울러 전쟁 국면의 변화와 관련하여 경주 지역의 군사적 동향을 검토하였다. 그동안 박의장이 활약한 여러 전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임진왜란 시기 경주 지역의 동향에 대한 연구에서 당시의 전쟁 국면과의 연관과 함께 나아가 射牌 등의 정예 군병 확보와 富山山城 축조와 방어군의 확대 등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경주 지역의 조선군의 대응과 군비 강화는 일본군의 경상좌도 북상을 저지하고 울산 지역 일본군 거점에 대한 압박을 가져와 임진왜란 극복의 한 원인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임진왜란 극복의 주체로서 수군과 명나라 구원병, 의병의 존재만을 부각하던 기존 연구에서 2000년대 이후 점차 관군과 지방관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지만 아직 지역별 동향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2014년 이후 영천, 대구 지역 등지의 임진왜란 시기 대응과 동향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여러 지역의 동향에 대해 추가적인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주는 일본군의 최대 거점이었던 울산 지역과 인접한 지역으로서 조선군의 최대 거점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고" 끝맺음 했다.
제3주제로는 '임란기 경주성 복성과 항쟁활동'을 김강식 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HK교수가 발표했다.
"임진란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임진란 전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밝혀지고 있다. 다만 전근대사회의 역사기록이 다양하였지만, 서술이 중앙의 왕조 중심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가 행해졌던 각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은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각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임진란사 연구는 전체의 임진란사 복원에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지금까지 임진란 시기의 경주지역에 대한 연구성과는 다른 지역보다는 많이 진행되었다. 이런 연구성과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먼저 임진란 시기에 경주지역에서 일어났던 의병운동과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있으며, 다음으로 임진란 시기에 경주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와 인물을 다룬 연구가 있다. 이 가운데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경주지역의 전투에 대한 연구는 의병활동을 한 인물에 대한 개별연구, 경주지역의 의병의 기반과 영향에 대한 연구, 경주지역에서 활동한 관군의 활약에 대한 연구, 경주성의 수복전을 다룬 연구로 구별할 수가 있다고" 했다.
또한 "조선시대 경주의 재지사족들은 임진란이 발발하자 4월 22일경부터 창의 거병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침략하자 기계로 도피했던 부윤 尹仁涵도 빼앗긴 경주성을 복성하고자 관군을 수습하였으며, 경주에서 창의한 각 의병장들은 영남좌도의 12고을 의병장을 월성에 모아 蚊川會盟을 결행하였다. 여기서 영천성과 경주성 복성을 결의하였다. 蚊川會盟은 뒤에 대구 팔공산회맹, 창녕 화왕산회맹으로 계승된 측면이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경주의 자발적인 의병들은 지역 인근에 출몰하는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통해서 전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실전 전투 경험은 이후 활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임진란 시기에 경주지역에서는 관군과 의병의 연합에 의한 항쟁이 전개되어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지역사례라고 할 수 있다."했다.
제4주제는 '임란기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과 명군의 동향과 활동사항' - 慶州 安康 戰鬪를 중심으로-를 김경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발표했다.
"명군 부총병 祖承訓이 이끄는 3천여 명의 명군이 평양성에서 패한 이후, 명 조정은 宋應昌과 李如松을 지휘관으로 삼아 4만 이상의 대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각지에서 징발되었으며, 대체로 일원적으로 움직였으나, 독자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따라서 명군 사이, 혹은 명 조정과 파견된 명군 사이에서도 갈등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명군 지휘부의 탄핵사유가 되기도 하였다.
명군의 참전 목적이나 전쟁 중 조선에서 행한 긍정적․부정적 역할, 조선의 대응 등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발표되었고,명군의 징발 체제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체로 명군은 파견 주체, 즉 명 조정의 성향을 반영하는 ‘집단’으로서 총체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았다.
전쟁 중 발생한 모든 전투․사건․논쟁은 전쟁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각 사안은 다른 사안과 인과적으로 혹은 평행적으로 구성된다. 전쟁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모든 요소에 주목하여야만 하는 이유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과 일본군은 언제나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며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각자의 지향은 예상치 못한 접촉을 발생시키는 일이 있었고, 작은 사건이 전쟁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경주 안강 전투는 전쟁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작은’ 사건이었다.
조선은 명 조정과 일본군을 포함한 세력들이 중층적으로 포진한 전장에서 여러 ‘외교적’ 경험을 축적했다.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명의 장수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어떻게 의사를 전해야하는지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고 있었다. 조선은 명과 일본이 주도하는 대로 끌려가기만 했던 것이 아니며, 얻은 경험을 활용하여 전쟁의 국면 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서 조선은 미약한 변수가 아니라 강력한 상수였다.
마지막 제5주제로 '임란기 경주석 탈환 이후 경주지역의 동향'을 신윤호 해관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충무공연수부 교수가 발표했다.
1.경주성 복성 이후의 경주수비 활동
가. 경주지역의 전투상황
나. 군체제의 정비와 병참활동
2. 정유재란과 경주지역의 전황
가. 정유재침에 대한 응전
나. 울산성전투와 경주 등으로 전개해나가면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큰 변화를 야기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는 당시의 국내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개전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말았던 국방력의 실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난극복의 동력이 되었던 의병의 사상적 기반 등이 그러하다. 조선침략을 주도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九州의 名護屋城에 약 3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 가운데 1번~9번대로 구성된 15만여 병력으로 침략을 감행하였는데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기점으로 하여 4갈래로 진격하였다.조선전국이 일본군의 침략에 무방비상태였으며 겨우 전라도만 보전되었다. 임란 초기의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 경주지역은 일찍이 일본군에 빼앗긴 성을 되찾았는데 이는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었다"고 보았다.
"경주지역이 종전까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군대조직의 정비와 군량․군수를 위한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에 있었다. 크게 싸울 수 있는 자와 싸울 수 없는 자로 나누었으며 싸울 수 없는 자는 농사를 짓고 짐을 나르거나 향리를 지키는 등 그 깜냥에 맞는 역할을 주었다는 것이다. 박의장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의 지휘능력이 더해져 극대화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싸울 때는 먼저 나아가는 모범을 보였고 군법을 엄히 하여 농사짓는 이들이 착취당하는 일을 방지하고 군공을 평가할 때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던 점 등이 그러하다. 이는 많은 인민들의 신뢰를 얻음으로써 강한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언춘 의병진의 경우는 典農將 혹은 勸農官을 두어 군량보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병을 육성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匠人에게 화살을 만들게 하였으며 현물교역, 봉녀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방법 등의 경제활동을 통한 군수품 조달 사례는 군대운영이 매우 체계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경주지역 관군 및 의병의 위와 같은 병참활동은 정유재침시에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하였다. 울산성전투 당시에도 경주는 대병력의 주둔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였을 뿐 아니라 군량조달에도 타 지역보다 훨씬 큰 부담을 져야만 했다. 예컨대 타 지역 병사들은 식량이 지급되었으나 경주의 병사들은 명군에 군량을 조달하느라 스스로 식량을 마련해야 했던 사례를 통해 볼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고충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종전까지 경주를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은 경주지역 民․官의 충의정신을 바탕으로 한 결속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김갑주 동국대(경주) 총장을 좌장으로 토론자로는 이수환 영남대학교 교수, 김진수 전 육군3사관학교 교수, 최재호 육군3사관학교 교수, 장정수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만주학센터 연구원, 장준호 웅지세무대학교 교수가 토론을 했다.
발표와 토론을 마치고 기념촬영
참석한 후원회 이사들의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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