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3차 대구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 성료 2016-09-25

2016년9월24일(토요일) 대구광역시 대강당에서 해주정씨대종친회 회장 정두섭, 해평윤씨윤두수선생후원회회장 윤금영, 충헌공홍세공선생 후원회, 단양우씨월평재후원회, 한강학연구원이사장 정재담, 성주도씨용호문중, 동래정씨임하공파문중, 배천조씨문열공조헌선생후원회, 칠원윤씨칠계군종회(헌민공)윤탁연선생종친회, 칠원윤씨대종회장 윤종진, 영천의병장강의공정세아선생 후원회, 임란의병한천한천승첩기념사업회, 대구한의대학교 명예총장 변정환, 대구・경북경재자유구역청장 도건우, 남계공손응현선생 후원회, 일직(안동)손씨모당공파종중, 달성서시낙재공문중, 전의이씨예산공파종중, 능성구씨대구무태문중, 용담공임흘선생후원회, 문경공류운용선생후원회, 순국의사노항공김연선생보본당종친회장 김소득, 무의공박의장장군후원회 회장 박동수, 문화류씨송호류정・제호류백춘선생 후원회, 구전공김중청선생 후원회, ()학봉선생기념사업회, 부용당공성안의선생 후원회, 참의공류종개선생 후원회, 진성이씨대종회 회장 이경락, 봉산회장류한익, 목사공박홍장장군13대주손 박신일, 경주최씨광정공파 종친회, 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사단법인 임란호국영남충의단보존회 이사장 곽동협, 문충공류선룡선생 후원회, 단양우씨열락당종중 역사박물관, 월곡공우배선장군 후원회, 풍산그룹회장 류진, 한음이덕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명환, 충무공이순신장군 후원회, 청주정씨백곡정곤수선생 후원회 정만용, 창재공정대임장군 숭모회장 정원표, 충목공유홍선생 후원회 유완식, 경주최씨백동공파 종중, 충의공권응수장군추모회 일동, 충렬공송상현선생 후원회 송정화 등의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48개 후원회애서 답지한 화환

 

방명을 한 다음

 

국민의례를 마치고

 

입추의 여지없이 강당을 가득채운 가운데

 

본회 류한성 회장의 개회사에서 "대구광역시에서 개최한 거점별 학술대회가 시발점이 되어 20152월 영천지역, 11월 경주지역, 12월 상주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2016년에 와서 520일 구미지역에서 학술대회를 마치고, 1012일 봉화지역, 1117일 문경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점지역별로 개최한 임진란사 연구의 성과물들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정리하면 한국의 임란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임란사를 올곧게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올바른 한국의 임란사를 집대성 하는 것이야말로 본회에 주어진 본연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제반 양상은 국제전 임진전쟁 당시와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하고, "임진란사를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많은 시사점과 값진 교훈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권영진 대구광역시시장이 공무로 해외출장 중인 관계로 정풍영 문화체육관국장이 대독한 환영사에서 "팔공산지역의 전황과 역사적 의의 등을 재조명하는데, 2013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고 말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공동체 정신으로 나라사랑하는데 적극 참고하고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돌아보면 국난극복에 앞장서 일제 강점기에 국채보상운동, 6.25전쟁의 낙동강 전투, 부정부패에 맞선 2.28민의운동, IMF에는 금모으기운동 등으로 대구의 정신을 알렸다고" 말했다.

 

변정환 대구한의대 명예총장은 이 사단법인을 이끌고 있는 류한성 회장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박수를 보내자고 유도했다.

뼈라픈 역사를 반복한다면 절대 안되며, 이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학술대회를 하는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우리나라는 휴전상태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임진왜란을 거울삼아 자주국방의식을 실천하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1주제: 임진란시 의병 창의문의 명분과 그 함의를 계승범 서강대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임진왜란 의병의 擧義 명분은 鄕保와 勤王 두 가지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중에서도 영남의병은 향보에, 호남의병은 근왕에 방점을 찍어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창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잘 정리한 격문이나 통문 또는 초유문의 내용을 잘 살피면, 그런 통설이 과연 無缺의 사실인지 약간의 재고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영남의병도 거병의 제1 명분은 어디까지나 근왕이었음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초기의 불리한 戰況上 각자의 향촌이 속한 군현 인근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지, 영남의병이라고 해서 창의거병의 명분 자체가 鄕保에 치우친 증거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록상으로는 勤王이 거의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따라서 영남의병과 호남의병의 거병 동기/명분을 향보와 근왕으로 지나치게 도식화하여 설명하는 통설은 약간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2주제: 임란시 팔공산 지역의 전황과 역사적 의의를 김진수 육군3사관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팔공산은 임란 개전 당시 대구 읍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이후 경상좌도 조선군의 주요한 항전 거점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대구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관군과 의병들을 지원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팔공산은 서애 류성룡의 관방론을 갖게 하도록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류성룡이 진사록에서 팔공산의 기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시대의 관방론을 정립하는 배경의 하나로서 팔공산을 주목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의 팔공산은 조선 조정이 산성 중심의 국방체제 내지 관방론을 재인식하게 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 팔공산이 인조대에도 주요한 방어시설로 주목받았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팔공산을 비롯한 산성들은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대외방어를 위한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팔공산의 전황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가치이자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3주제: 임진란시 대구지역의 의병활동과 명군일본군의 동향 우배선 장군을 중심으로-를 김경태 고려대학교 문과대 연구교수가 발표했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우배선은 과감히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고향에서 가문을 이어받아 조용히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던 젊은 학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였고 가족이 많지 않았다. 학맥이나 인맥도 화려하지 않았다. 정치의 경험도 없었다. 재산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신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숨어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지역의 백성들 역시 기댈 곳이 없어져 도망쳐버릴 것이고, 지역이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질 것이다. 나라가 무너지는데 가정과 집안이 온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내가 힘을 다해서 적을 토벌하는 까닭은 우리 집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보잘 것 없는 힘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함이고, 또 나의 선세가 모두 일찍 세상을 마쳐 오직 나 홀로인 채 형제가 없으니 다행히 외로운 군사로 포악하게 침략하는 왜적을 막아서 가족들이 칼날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 나의 뜻일 뿐라며 겸손한 자세를 보인 것은 이러한 흐름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4주제: 임진란시 대구지역의 항쟁활동과 그 의의 –최씨삼충(최인최계최동보)을 중심으로-를 장준호 웅지세무대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최씨 삼충의 의병 활동은 유사하면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창의 과정에서는 최인 · 최계 · 최동보가 같은 가묘와 가족을 보호한다는 자위적 측면에서 거병하였다. 이미 전란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고, 피난을 가기보다는 적을 맞서 싸우자는 맹서도 하였다. 이들의 창의 목적이 피난보다는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어졌고 대구부에 많은 일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도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최씨 삼충의 의병 활동에 가장 큰 분기점이 된 것은 초유사 김성일로부터 의병장의 직함이 부여되면서 부터라고 생각한다.

이미 최계는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한 경험이 있었고, 의병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초유사 김성일의 명령에 따라 초유문과 격문을 각 면에 발송하는 소모관의 역할을 하였다. 반면 최인과 최동보는 김성일에게 각각 공산의병장 · 공산관군장의 직위를 받았으나 이전의 의병활동과는 별다른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최계는 의병가장의 임명되면서 관군적 성격으로 일본군과 항전하게 되었고, 최인과 최동보는 상대적으로 군령 체제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주변 의병장들과의 공동작전 수행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5927월을 기점으로 최인 · 최동보 와 최계의 의병군이 다른 활동 방향으로 대구 방위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기관장과 기념촬영

 

종합토론

좌 장 ; 류한성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장)

토 론 : 김호종(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최재호(육군3사관학교 교수), 김한신(고려대학교 한국사 연구소 연구원), 김만호(전남대학교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