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6년 10월 봉화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 성료 2016-10-12

20161012() 봉화군민회관에서 풍산그룹 회장 류진, 월천조목선생선양회, 반남박씨소고문중, 민절공백암김륵선생후원회, 진성이씨대종회 회장 이경락, 청주정씨백곡정곤수선생후원회, 충무공이순신장군후원회, 충헌공홍세공선생후원회, 문화류씨송호유정・제호류백춘선생후원회, 용담임흘선생후원회, 한음이덕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명환, 무의공박의장장군후원회 회장 박동수, 목사공박홍장장군 13대주손 박신일, 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부용당성안의선생후원회, 참의공류종개선생후원회, 충렬공송상현선생후원회, 충목공유홍선생후원회, 문경공류운용선생후원회, 구전김중청선생후원회, 풍산류씨대종회 회장 류종묵, 성균관청년유도회 중앙회장 임대식, 영천의병대장정대임장군숭모회 회장 정원표,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 봉화임란의병유족회 회장 금석록, 사단법인 학봉선생기념사업회, 해평윤씨오음윤듀수선생후원 회장 윤금영, 송단신경회선생 12대손 신태관, 수서박선장선생후원회, 문충공류선룡선생후원회, 배천조씨문열공조헌선생후원회, 성재고상증선생후원회, 충의공김인상선생후원회, 칠원윤씨대종회장 윤종진, 칠원윤씨칠계군종회(헌민공)윤탁연선생후원회의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관계 기관장과 전국각지의 후원회에서 4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화학술대회가 성대히 열렸다.

 

 

경향각지에서 450여명의 후원회 참석했다.

 

만석을 이룬 가운데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고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마치고

 

류한성 회장은 개회사에서  "오늘 1012일 이곳 봉화지역에서 뜻 깊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경상북도 김관용지사께서도 재정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곳 박현국 도의원께서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 학술대회 이후 1117() 문경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렇게 거점별・지역별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얻어진 성과물들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정리하면 학국의 임진란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임진란사를 올곧게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올바른 한국의 임진란사를 집대성하는 것이야말로 본회에 주어진 본연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제반양상은 국제전 임진전쟁 당시와 대동소이 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진란사를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많은 시사점과 값진 교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회의 모든 회원들은 임진란 호국선현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비롯한 각종행사를 통해 임진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정신을 되새겨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어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확립시키고져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 학술대회에서 주제논문을 발표하시고 토론해 주실 학자님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본 학술대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서서 이끌어 주시고 제반 준비상황을 점검해주신 홍순벽 부회장님을 비롯한 성기호・김세현・임충빈・김진현・류정식 재정운영위원님과 본 행사에서 접빈해 주시고 행사를 집행해 주시는 봉화임란의병 유족회 금석록 회장님을 비롯한 봉화군 관계자 여러분들과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고 했다.

 

환영사는 김동용 부군수가 해주었다.

 

축사는 경상북도 김관용지사가 도에 사드문제와 경주 지진 등 문제로 참석치 못해 경북문화예술과 백영길 과장이 대신해 참석하여 대독했다.

 

이어 봉화군의회 김제일 의장이 축사를 해주었다.

 

강석호 의원의

 

축전과

 

변정환 대구한의대학교 명예총장이 "봉화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를 축하드린디"는 축전과

 

우동기 대구광역시 교육감도

축전을 보내오고

 

TBC 대표이사 김정길 사장도 학술대회를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2부 학술대회에서

제1주제로 '임란기 봉화지역의 유학과 학맥'을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이 발표 했다.

임난기 영주․봉화 지역의 사족들 역시 국가 및 지역 공동체가 외세에 의해 유린되는 현실을 접하고, 또한 관병의 패퇴로 이의 극복이 국가의 힘을 기다려서는 불가능함을 인식하자 대대적인 의병활동에 나섰다. 전쟁 초기 招諭使 金誠一과 함께 일종의 투톱을 이루며 의병활동을 독려했던 安集使 金玏을 필두로 영주․봉화 지역의 많은 사족들이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와 사회경제적 기반을 활용하여 직접 의병활동에 나서거나 군량 조달과 피난민 구호 등의 활동을 펼쳤다.

임난기에 개인의 안위보다는 공동체의 위란을 걱정하며 흔연히 봉기한 영주․봉화 지역 유현들의 의식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지향도 결국은 이것일 것이다. 비록 영남학맥에는 속하지 않지만 숙종대 후손이 봉화로 이거해 온 洪世恭(鳳溪/남양: 1541~1598)의 경우도 지역의 이런 절의와 염치 문화를 더 풍성하게 하는 사례이다. 임난 때 調度使로 활동하면서 明軍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헌신했던 홍세공은 전란의 와중에 과로로 인한 열병으로 임종하였는데, 후손들에게 과거를 보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절의의 실천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먹고살 수 있는 재화가 있는 이상 부귀 그 자체를 탐하지는 말라는 취지이다. 임난기 의병활동의 성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층 숙성된 지역의 유학은 기존의 학맥을 한층 심화․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뒤에 타지에서 이거해 온 이와 같은 새로운 학풍과 가풍들을 수렴하고 접목시켜 가면서 지역의 유풍을 풍성하게 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제2주제로 '임란기 봉화소천지역의 전투와 항쟁 활동'을 노영구 국방대학원 교수가 발표했다.

 

본 발표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7월 말 봉화 소천 지역으로 침공한 일본군 3천여명을 柳宗介가 이끈 조선 의병 600여명이 맞서 싸워 일본군의 경상도 북부 지역 장악을 저지한 전투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선조수정실록 등의 주요 자료에 류종개 등의 활약과 장렬한 최후 등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있지만 전투의 배경과 구체적인 전투 경과, 그리고 전투 이후의 양상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소천 전투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단독 연구는 보이지 않고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와 경북의병사 등의 임진왜란 통사 등에 임진왜란 중 경상도 지역의 주요 전투의 하나로 정리되어 있으나 전투가 일어난 날짜나 구체적인 경과 등에서 내용상 오류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봉화군사에 전체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고 안동지역 의병의 활약을 검토한 여러 논문에서 간략히 이 전투가 언급된 정도이다.

 

소천 전투와 이어지는 방어전의 성공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이 좌절되면서 이 지역은 안정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동별읍향병과 같은 대규모 의병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경상도 지역 조선의 반격의 주요 근거지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10월 말 이후 조선과 일본이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고 대치하던 상황에서 임진년 연말부터 경상도 북부 지역 의병과 관군은 상주의 唐橋 등 일본군의 주요 거점에 대한 공세에 나서 일본군을 크게 압박하여 성과를 내었다.

 

제3주제로 '임란기 봉화지역 지방관의 전쟁대응과 민의 전쟁체험'을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연구 발표했다.

봉화가 위치한 이러한 지리적인 특징은 전쟁이 발발하자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임진왜란기에 봉화는 복 받은 땅으로 불릴 만큼 일본군의 침입을 받지 않는 건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부근의 영주, 풍기, 예안 등과 함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화를 입지 않은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임진왜란기에 봉화가 전쟁과 상관없는 곳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동부가 622일에 일본군의 침입을 받기 전후로 하여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79일에는 일본군이 청량산까지 침입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기에 봉화 현감으로 재직한 사람은 4명으로 황시(黃是), 김부륜(金富倫), 김충남(金忠南), 김삼익(金三益)으로 파악하였다. 황시는 고향이 풍기이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대로 직임을 수행하였다. 김부륜은 퇴계의 제자이자 지역의 인사로서 봉화에 부임했으며, 김충남 역시 퇴계의 제자였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에 임진왜란 중에 부임한 봉화현의 수령들은 지역 및 학맥에서 봉화현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4주제로 '임란기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의 동향과 활동 상황'을 고려대학교 CORE 사업단 연구교수가 발표했다.

 

본 발표문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인 7월 말, 봉화의 소천 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전투는 柳宗介와 尹欽信, 尹欽道 등이 이끄는 의병이 2~3천여의 일본군과 싸워 분패한 사건이다. 봉화를 비롯한 경상좌도의 북부지방은 전쟁 이후에도 한 동안 병화를 입지 않았다. 의병을 일으키려는 義士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혹 의병 때문에 오히려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한성에 모였던 일본군이 조선 각지를 공략하기 위해 흩어지면서,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에도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유종개 등은 의병을 창의하고 수백 명을 모아 太白山 위에 진을 구성하였다. 그즈음, 근처에 접근한 일본군이 平海, 蔚珍 등지를 분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廣比村을 넘어 들어오면 봉화의 小川과 才山이었다. 유종개는 윤흠신, 윤흠도 형제 등과 더불어 미리 전진하여 적을 막으려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의 선봉 일부가 조선인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산을 넘어왔고, 의병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진영의 위치와 형세가 적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의병은 불리한 형세에 놓이게 되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패하였고 유종개와 윤흠신, 윤흠도 형제도 전사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原州로 향했다. 한국학계에서 이 전투를 다룬 거의 유일한 연구인 이형석의 壬辰戰亂史에서는 전투를 평가하기를, 기습하려던 군사가 도리어 기습을 당하였다는 일례로서 주요한 원인이 적군의 변복부대사용과 이에 대한 오인이었다고 보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봉화 소천 전투는 이전까지의 연구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의병활동은 의병이 활동했던 지역에서만 기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쟁은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쟁의 작은 부분은 신체의 일부분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요성은 크기로만 따질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짧은 시간 사이에 인간사의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지기에 작은 부분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제5주제로 '임진란 이후 봉화지역의 전후복구와 사회재건'을 김세현 본회 재정운영위원이 발표했다.

 

봉화는 지리적으로 동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의 태백산맥 준령들이 감싸고 있고남쪽으로는 일월산과 청량산이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둘러싸서 트인 곳이라고는 낙동강을 따라 흐르는 남쪽의 안동부와 내성천이 흐르는 곳과 서쪽에는 순흥부와 경계한 오지(奧地)중의 오지로서 그 산세를 따라 주민들의 기상도 굳세고 강하며,매우 배타적인 보수적인 성향과 자생력이 강한 억센 기질을 보인다.

 

  전후(戰後복구는 정신적제도적물질적 복구를 종합해서 말하는 것인데정치나 관료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행정적으로는 오히려 전시(戰時체제를 답습하여 일반 행정에도 전령(傳令)과 군율(軍律)을 적용하여 주민들을 옥죄는 강도를 심하게 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경제물질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거(住居)를 위한 건물과 경작을 위한 농토는 그대로 보전이 됐지만 인구 감소로 황무지로 변한 것을 새로 개간 작업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으며다행히 이 지역은 평야지가 적고 대부분이 산간으로 둘러싸서 초근목피의 빈한한 생활에 익숙한 탓에 비교적 적응이 빨랐으며대규모의 노비(奴婢군도 없어서 사회가 불안해도 동요가 적었으며정신적으로는 마을마다 사족(士族)들이 서당(書堂)을 열고향약(鄕約)이 시행되고 있어서예의(禮義염치(廉恥)가 있는()이전의 도덕과 윤리가 우선인 매우 높은 문화로 생활화한 까닭에 쉽게 종전과 같은 일상으로의 복귀가 쉬웠다.

 

이어 토론회에는 본회 류한성 회장이 좌장을 맡은 가운데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김호종 (안동대 명예교수), 이선희(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초빙교수), 장정수(고려대학교 민족학센터 연구원), 임충빈(본회 재정운영위원)이 열띤 토론을 했다.

 

기관장과 선양회 임원과 종손 내외빈들이 기념촬영

 

발표자와 토론자들 기념촬열

 

봉화군청 실무진과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임원과 기념촬영

 

학술대회 참석자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