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8년도 대구 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 성료 2018-09-19

2018년 9월19일(수) 오전 10시, 경북대학교 정보전신원 비젼홀에서 永川李氏 聾巖門中, 永川李氏 少尹公派 會長 이재호, 옥산전씨 문평공파문중, 일직손씨 모당공파종중, 달성서씨 낙재문중, 능성구씨 동변종회 종회장 구자경, 社團法人 淡水會 會長 朴淵鐸, 憲敏公 尹卓然先生 後援會, 서초지역 세무사회장 문명화, 성산배씨 진사공파 종중, 문화류씨 공산군파 도사공종중, 풍천任氏 安東宗中, 忠㤠公宋象賢先生後援會 宋廷和, 芙蓉堂公成安義先生後援會, 參議公柳宗介先生後援會, 永川義兵將 湖叟 鄭世雅 門中, 息城君李雲龍將軍保存委員會, 牧使公朴弘長將軍 13代 胄孫 朴信一, ()博約會 大邱廣域市支會長 朴道圭, 柳川公柳初先生後援會, 豊山柳氏愚川門中 (修岩宗宅) 柳漢珉, 永川義兵大將昌臺公鄭大任將軍後援會 鄭元杓, 월암공 김호장군 후원회, 社團法人 壬亂義兵漢川勝捷記念事業會 會長 朴商汶, 선산김씨 대동종친회장 김광우, 淸道助戰將兼密陽都護府使 朴慶新 先生 後援會, 雲谷公 朴文富 先生 後援會, 武愍公黃進將軍後援會, 寒岡鄭逑先生記念事業會, 忠穆公兪泓先生後援會 兪完植, 霽峰高敬命先生記念事業會, 淸州鄭氏栢谷鄭崑壽先生後援會 鄭蔓容, 白川趙氏文烈公趙憲先生後援會, 文忠公柳成龍先生後援會, 文敬公柳雲龍先生後援會, 忠武公李舜臣將軍後援會, ()西厓先生記念事業會 理事長 柳津, 成均館長 金煐根, 大邱韓醫大學校 名譽總長 卞廷煥, 의병도대장 김면장군후원회 南齋, 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 지봉스님, 忠壯公李光岳將軍後援會 李光熙, 忠憲公洪世恭先生後援會 洪淳璧, 東萊鄭氏 林下公宗中, 함안조씨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종회장 조현판, 佳岳齋公李軸先生後援會 李健守, 武毅公朴毅長將軍後援會 會長 朴東洙, 玄風郭氏 禮谷公派 宗中,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釜山支部長 朴熙鳳, 영천이씨 매암공파 종중문천 문중회 회장 이돈구, 전라좌의병장 ()삼도 임계영 선생 기념사업회의 화환이 답지하고 4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경북대학교
 
정보전산원 비젼실에서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채우고
 
내외빈이 자리한 가운데
 
최홍조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강의교수가 1부 사회를 맡아서 진행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주최자인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류한성 회장은 개회사에서 "이곳 大邱地域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가 주관하여 2012년에 거행한 壬辰亂 7周甲 記念 文化·學術大祭典에서 4에 걸쳐 國際學術大會를 개최하여 전체의 壬辰亂史를 총체적·거시적으로 접근한 이후 20121031일 임진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지역으로 선정되어 최초로 거점별 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임진란사를 미시적으로 조명하는데 선구자적인 개척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임진란사 정립에 크게 이바지함으로써 임진란사에 영원히 기록될 자랑스러운 고장으로 우뚝 섰습니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의 고장 대구지역에서 연속해서 네 번째 개최하는 학술대회(본회 전체 22번째)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따듯하게 환영해 주신 대구광역시민 여러분과 재정지원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권영진 대구광역시장님과 김상동 경북대학교 총장님을 비롯한 배지숙 대구광역시 의회 의장님·의원님과 나아가 경향 각지에서 왕림하신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원님들께서 다 함께 자리하시어 새로운 역사의 한 장을 마련하는 자리에서 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를 대표해서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회는 대구광역시로부터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개년에 걸쳐 재정지원을 받아 대구지역 임진란사를 조명하여 2017년에 대구지역 임진란사를 간행 배포했습니다.

書冊慶尙北道2015년부터 2018년까지 4개년에 걸쳐 慶北道內 9個 地域 임진란사를 조명하여 금년에 간행·배포한 경북지역 임진란사와 더불어 미시적으로 접근한 거점별·지역별 임진란사 연구의 기본서가 되고 典範이 되리라고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본회는 각종 학술대회를 통해 얻어진 결과물 가운데 보존가치가 있는 書冊들을 계획을 세워 순차적으로 간행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 壬辰亂 文獻目錄Ⅱ》 2권과 壬辰亂 硏究叢書4권을, 2016년에 壬辰亂 偉勳錄7권을 간행했으며, 금년 순천지역에서 개최하는 정기총회에 즈음하여 11년에 걸쳐 전국에 산재한 임진란 지도자들의 세거지를 일일이 방문하여 유적·유물과 기념물들을 빠짐없이 촬영하여 편집한 950쪽이 넘는 임진란 7주갑 기념 화보집을 간행할 예정이며 연이어 임진란 7주갑 기념 백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본회는 대구·경북지역을 넘어서 전국각지에서 빠짐없이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여기서 발표된 論考를 집대성한 임진란 연구총서간행하여 임진란사 연구의 정통성을 확립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회는 임진란사를 연구하여 임진란사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연구단체로 영속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본회는 2017년에 대구·경북지역을 넘어서 충북 청주지역·경남 합천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금년 하반기에 전남 순천지역과 부산지역에서도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임진란은 어느 경계지점을 경계로 멈춘 국지전이 아니고 전국으로 확대된 전면전이고 조선·일본·명나라가 다 함께 참전한 국제전이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북쪽 황해도·평안도·함경도 지역의 임진란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야 할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북한 지역에서의 임진란 관련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남·북한 학자와 전문가가 다 함께 참여하는 남북한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남북 학술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만 임진란 전체의 전모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임진란사의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본회의 구성원들은 임진란 호국 선현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중심으로 한 각종 행사를 통해 임진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정신을 되새겨 여러 교훈을 얻어서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 학술대회에서 주제 논문을 발표하시고 토론해 주실 학자 여러분의 열정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공사다망하심에도 시간을 할애하시어 축사를 해 주실 김상동 경북대학교 총장님·배지숙 대구광역시 의회 의장님·배한동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나아가 본 학술대회를 주관하시어 조직하고 운영하는데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해주신 정병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소장님을 비롯하여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매번 빠지지 않고 왕림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신 본회 단체 회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고 끝을 맺었다.

 

김상동 경북대학교 총장은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주최하고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가 주관하는 제22 임진란사 학술대회가 개최됨을 진심으로 축하한고" 말하고, 오늘 임진란 전후 대구지역의 유학과 연경서원에 대해 심도 있는 발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구시 북구 연경동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진 연경서원은 대구지역 최초의 서원으로 이 지역의 유학을 선도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했으며, 연경서원은 학자를 길러내는 곳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유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임진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하기도 하기도 했다고 했다.

또한 지역의 선비들이 국가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나 선비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이라 생각하며,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한 선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오늘 학술대회에서 연경서원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각별한 시간이 되리라 기대한다고 했다.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는 각 지역의 임진란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여 방대한 자료집과 연구총서를 간행하였으며, 임진란사 연구의 토대를 구축한 점에서 학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현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이 어떠하냐에 따라 내일 우리의 미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물지 않은 많은 역사가 있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도 있습니다. 오늘 이 학술대회가 임진란으로 인한 민족적 상처를 치유하고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아울러 임진란 전후 대구지역의 유학과 학풍을 올바로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환영사를 했다..

 

김혜정 대구광역시의회 부의장은 축사에서 "충만한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아 대구지역 임진란사 연구를 위한 학술대회가 열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말하고,

이번이 대구지역에서의 임진란기 업적과 학문연구활동을 재조명하는 네번째 행사이기에 더욱 뜻깊게 생각히며, 한 국가가 변화하고 발전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전쟁은 성장통이 되기도 합니다.”

“16세기말,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은 일본이 일으킨 임진란은 우리민족에게 큰 수난을 안겨주었고, 7년간의 긴 전쟁 기간 동안 우리나라 곳곳에서, 내륙과 해상에서, 장수와 승려, 선비출신의 의병들이 구국활동을 펼쳤다고 말하고, 풍전등화 앞에 놓인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양반과 상민, 천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싸웠습니다. 강경한 민족자부심을 보여주었다고 강조하고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서는 선비들과 의병조직을 아우른 진군이 결성되고 동화사는 승병들의 사령부가 되었으며, 대구에 유학 르네상스를 일으킨 연경서원 역시 의병조직의 거점지로 활약했으며, 당시 우리 민족에게 전쟁은 군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함께 극복해내야 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 결집력이, 민족정신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대회가 우리 조상들의 임란기 상황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하며, 더욱이 대구의 연경서원과 선비사상을 재조명할 수 있는 주제발표들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시키는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가 임진란을 겪은 우리 민족의 정기를 후대에 이어가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기 위한 발판이 되길 소망한다고 끝을 맺었다..

 

배한동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겸  본회 고문은 축사에서

"먼저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가 주최하는 대구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가 경북대학교에서 개최되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임진란은 1592년 발발하여 1599년 끝난 7년 전쟁입니다. 당시 임금인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했지만, 당시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림들과 의병들의 투쟁은 결국 임진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이때 의병의 지휘를 따른 민초들의 희생정신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한성 선생이 이끄는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는 임란 시 활동한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을 발굴 조사하고 선양하는 훌륭한 사단 법인체입니다. 선양회는 그간 4회에 걸친 국제학술 대회, 22번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임진란시의 의로운 선비들의 대응 자세와 의병들의 피나는 투쟁을 재조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선양회는 임진란 문헌 목록 2, 임진란 위훈록 7, 최근에는 대구경북지역 임란 사 4권을 발간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헌은 자료는 이 나라 임진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바쁘신 데도 참석하신 경북지역의 유림 후손 여러분! 흔히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400여 년 전의 역사이지만 우리는 임란 시 나라를 위해 투쟁하신 선조들의 위업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뼈아픈 임란 역사를 잊었기에 우리는 한 말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것입니다. 내년 2019년은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 이 되는 해입니다. 저도 독립운동 정신 계승사업회의 책임을 맡고 사람으로서 임란 정신문화선양회의 이러한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 학술대회는 임란 전후의 대구지역 선비의 유학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인 것 같습니다. 특히 대구 북구 무태 연경서원을 중심으로 뭉쳐진 선비들의 학문과 사상을 조명하는 이 학술 학술대회는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 개인적으로는 저의 13대 조부 등암 배 상룡 선생이 서원을 자주 출입하셨고 스승 정구 선생을 이곳에서 자주 배알하였던 서원이라 감회가 남다릅니다. 오늘 발표와 토론에 참석하시는 중견 학자 여러분들의 연구 발표가 임진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 이 선양회는 학술대회를 경상도에 국한하지 않고 전라, 충청, 경기 지역 등으로 그 범주를 넓혀 주었으면 합니다. 욕심을 더 낸다면 남북의 평화 통일의 기운이 감도는 시대에 북한과 임란 사 연구 결과물을 공유뿐 아니라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를 제안 드립니다. 저도 과거 한국 연구재단 남북 학술 교류 협력 위원장 재직 시의 경험을 살려 선양회의 대북 교류 협력 사업에 조금이나마 기여할까 합니다.

끝으로 이 학술대회를 준비하신 유한성 회장님, 이 천룡 사무총장님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 학술대회 자리를 제공하시고 바쁘신 중에도 기꺼이 축사를 해주신 경북대학교 김 상동 총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의 가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면서 축사에 가름한다"고 했다.

 

내외빈과 기념촬영

 

2부 사회도 최홍조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강의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제1주제로 '임진란 전후의 선비사상과 실천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를 장윤수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가 발표했다.

"경상도에서도 선산 지역은 특히 인재의 고장으로 명성이 높다. 그래서 선산 출신의 학자이자 관료인 노경임(盧景任, 1569~1620)선산읍지서문을 쓰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회자된 유명한 말을 인용하였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선산은 조선조 사림파(士林派)의 발상지이다. 통상 사림파라고 할 때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의 계보를 언급하게 된다. 이때 언급되는 길재, 김숙자, 김종직이 모두 선산 출신이고, 김굉필 또한 선산과 깊은 연고를 갖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선산 지역은 사림파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인재의 요람이었던 선산 지역은 계유정난, 무오사화, 을사사화, 기묘사화를 거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로 인해 정작 사림세력이 정권을 주도해 나간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선산 출신의 인물들이 더 이상 영남을 주도해나가지 못하였다.

대구지역의 성리학 전통과 관련하여 우선 주목할 만한 인물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다. 그는 한국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김굉필의 제자 대부분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큰 화()를 입게 됨으로써 이후 대구지역의 성리학계는 16세기 중반까지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16세기 중반 이후 대구지역 성리학의 지형도를 말한다면, 일반적으로는 퇴계학맥과의 연관성을 먼저 거론할 수 있다. 예컨대 서원제향(書院祭享)과 관련해서 살펴본다면, 1564(명종19)에 대구의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퇴계의 문인인 이숙량(李叔樑, 1519~1592)과 전경창(全慶昌, 1532~1585)이 주도하여 이 지역 최초로 연경서원(硏經書院)을 건립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퇴계 이황을 제향하였으며, 그 후에 다시 퇴계의 제자인 정구와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배향하였다. 그리고 별사(別祠)에는 역시 퇴계의 문인인 이숙량과 전경창을 종사(從祀)하였다.

임진란은 대구지역 학자들에게 위기이자 기회로 작용하였다. 생존 환경에서는 위기로 작용하였고, 학문의 진작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다. 임진란 직후 한 세기, 17세기는 대구지역 성리학이 가장 큰 특색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임진란 이후 서사원과 손처눌은 대구지역 학문 부흥의 중심에 섰다. 이들은 전쟁 후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교(禮敎)의 진흥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하여 선사재(仙査齋)에서 흥학(興學)을 결의하고 강회(講會)를 여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원규(院規)를 마련하고 이곳을 대구 사림의 강학장소로 삼았다. 연경서원이 중건되자 한강은 이곳에 퇴계 이황을 봉안하는 봉안문을 짓고 연경서원의 중수(重修)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고유문(告由文)을 찬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제2주제로 '연경서원(硏經書院)의 건립과 대구지역의 학풍'은 정병호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과 교수가 발표했다.

1563년 대구지역에 硏經書院이 건립되었다. 대구 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이다.

연경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구지역 제1세대 유학자들은 全慶昌(1532-1585), 蔡應麟(1529-1584), 鄭師哲(1530-1593)이고, 이들에게서 강학을 받거나 교분을 맺은 제2세대 유학자로는 郭再謙(1547-1615), 孫處訥(1553-1634), 柳堯臣(1550-1618), 徐思遠(1550-1615), 鄭光天(1553-1594), 李輈(1556-1604) 등이다. 1세대 유학자들은 대부분 퇴계의 문인들이고, 2세대 유학자들은 대부분 寒岡 鄭逑(1643-1620)의 문인들이다. 이런 점에서 연경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구지역 제1세대와 제2세대 유학자들은 퇴계학과 한강학이라는 강력한 자장 아래에 있었다.

연경서원 건립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1563년 봄에 대구지역 선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유림의 공의를 모아 대구부사 朴應川( ? -1581)에게 서원건립을 건의한 이는 바로 梅巖 李叔樑(1519-1592)이다. 배움을 향한 고을 선비들의 마음을 가상히 여긴 박응천은 흔쾌히 서원 건립에 동의하고 재목과 기와, 노비와 밭을 하사하는 등 인력과 재원을 지원해 주었다. 후임 부사 朴承侃(1508-1588)도 전임부사의 뜻을 이어 서원 건립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관아의 지원 아래 유림들은 역할을 분담하여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서원 건립은 李叔樑(1519-1592)이 주관하였는데 溪東 全慶昌(1532-1585)이 그를 도와 함께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5643월에 상량을 하고 156510월에 완공하였다. 지역의 유림들이 힘을 합쳐 건립한 점에서 연경서원이 의미는 각별하다.

李叔樑은 예안 출신으로 중년에 대구 연경의 畫巖 아래로 移居하여 서재를 열고 후학을 가르쳤다. 전경창은 수성의 파동에 거주하였는데 퇴계의 문인으로 대구지역에서 퇴계학을 처음으로 계승한 인물이다.

퇴계는 서원의 기능과 목적을 학교의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서원은 위기지학을 공부하기에 최적의 공간이라고 하였다. 연경서원이 제향보다는 강학에 중점을 두고 건립된 서원이라는 점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연경서원의 건립을 통하여 吾道를 확산하여 후학을 양성하려고 한 것이다.

 

제3주제로는 '연경서원(硏經書院) 강학과 대구지역 제3세대유학자'는 구본욱 대구가톨릭대학교 산학협력 교수가 발표했다.

연경서원은 조선 중기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원이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이 건립된 20년 후인 1563년에 건립되어 대구지역을 학문과 교육, 문화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이 없는 서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강당을 비롯한 동·서재 등 강학을 위한 공간만이 건립되었다. 사당은 1613년에 건립되어 퇴계선생을 봉안하였다. 이것은 이 서원이 제향보다는 강학(교육)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배향의 인물을 퇴계선생으로 하였다는 것은 이 서원이 지향하교 있는 교육의 목표가 퇴계학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012<연경서원의 경영과 조선중기 대구지역의 유학>에서 연경서원에서 강학한 분들을 제1, 2, 3세대로 구분하고 그 系譜圖를 작성하였다. 여기에서 1세대는 연경서원을 창건하고 처음으로 강학을 하였던 분들을 지칭하였고, 2세대는 1세대로부터 교육을 받은 분으로 연령면에서 20여세차이가 나고, 3세대는 임진란 이후 연경서원을 중건하고 2세대로부터 강학과 通講을 받은 분으로 규정하였다.

논자는 위 논문에서 1, 2, 3세대의 명단도 제시하였는데. 당시에 3세대의 명단은 大邱儒賢 通講錄에 의거 정리하였다.

 

2세대

수정본

마지막 제4주제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학문과 지도자로서의역할'을 홍원식 계명대학교 인문국제대학 철학윤리학과 교수가 발표했다.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은 임진란을 전후한 시기 대구를 중심으로 낙동강 중류 일대에서 활동한 대표적 유학자이다. 그는 17세 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이어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과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30~1593)에게도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가르침을 받은 세 사람은 당시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로, 이들은 대구지역 1세대 유학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 전경창만 이황의 문하에 출입했으며, 그는 또한 이황의 권유를 받들어 대구지역 최초의 서원인 화암서원(畵巖書院, 뒷날 硏經書院)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그는 얼마 후 관직생활로 대구를 떠나게 되면서 대구지역에서는 아직 퇴계학의 영향이 그다지 미치지 못했다.

대구지역이 퇴계학의 영향권으로 접어들게 된 주요한 계기는 위의 1세대 유학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서사원을 위시한 대구지역 2세대 유학자들이 속속 당시 성주지역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하로 나아가면서 부터이다.

임진란 뒤 먼저 그는 전란으로 불 탄 향교와 연경서원을 복원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정사철을 이어받아 선사재에서 강학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편 그는 스승 정구와 수시로 내왕하며 학문을 닦던 중 마침내 그의 주도 아래 정구를 대구지역으로 옮겨오게 했다. 정구는 대구 인근 노곡정사에 자리를 잡았다가 이곳이 불타게 되자 다시 사양정사로 자리를 옮겨 지내다 세상을 떴다. 정구의 대구지역 이거(移居)는 바로 대구지역 퇴계학파의 본격적 전개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사원은 정구를 모시며 그의 사우들과도 긴밀한 교유관계를 가졌다. 서사원이 이황의 문헌을 직접 접한 것은 그의 문집이 간행된 1590년대 중반 이후이며, 이를 가지고 본격적인 연구와 강학을 한 것은 이보다도 더 뒤이다. 따라서 그의 퇴계학 계승은 많은 부분 정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서사원은 전체 제목 없이 인도(仁圖)·구인도(求仁圖)·성기도(誠幾圖)·성경도(誠敬圖)·일신도(日新圖)·삼물도(三勿圖)·율려도(律呂圖)·간문자도(看文子圖)8개 도설로 성리설을 정리하였다. 본 도설을 문집 속에 본 도설을 포함시키면서 그 말미에 이상의 그림은 선생의 일기책의 장의(粧衣)에 있었는데 자획의 방()과 변()이 자못 빠져서 본 그림의 배치는 감히 그 면목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선생의 유묵이 깃들었으므로 지금 우선 남겨 둔다고 적어 놓았다. 도설류(圖說類)의 저술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즐겨 행한 것으로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한 특징으로 거론되기도 하며, 흔히 권근(權近)입학도설(入學圖說)을 그 원류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도설로 저술한 까닭은 복잡한 성리설을 시각적 표현을 통해 전체적이고 체계적이며 핵심적으로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로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거나 자신의 실천수양공부를 도모하기 위해, 혹은 학생들을 쉽고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저술할 때 많이 선택하는 방법이라했다.

 

류한성 본회 회장을 중심으로 토론자로 추제협 (계명대학교 인문국제대학 철학윤리학과 교수), 조 순 (대구가톨릭대학교 안중근연구소 교수), 박규홍 (경일대학교 교육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정우락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연경서원은 언제 건립하느냐고 질문하고 잇다.
 
오늘 학술발표가 임진란하고 맞지 않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발표자와 토론자 기념촬영
 
행사에 지장이 없도록 진행에 협조한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정지아 조교와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과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