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남계실기(南溪實記) | 2021-10-08 |
손진담 박사 『국역 남계실기』 발간 남계공 손응현 선생 생애와 임진왜란서 봉기 활동사 추모글 모아 고경 출신 수필가 손진담 박사 펴냄
‘국역 남계실기(南溪實記) 간행위원회’ 대표이며 수필가인 영천지역 출신 손진담 박사가 펴낸 『국역 남계실기』가 오늘의문학사에서 발간되었다. ‘남계실기’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고천서원(古川書院)에 배향된 십현(十賢) 중 남계공(南溪公) 손응현(孫應睍) 선생의 생애와 임진왜란에서 창의하여 봉기한 활동사를 기록하고, 그 행적을 칭송 추모하는 글을 모은 문집이다. =책에 대한 평가 새천년이 되어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2010년에 <사단법인 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가 발족하였고, 후원단체로 <남계공 손응현 선생 후원회>가 태어났습니다. 2017년 임진란 7주갑(周甲)을 기념하여 선양회에서 발간한 임진란 위훈록에는 ‘영천의 충렬 지사 남계공 손응현 선생’이란 제목으로 남계공의 공적 사항과 기타 자료로 발간된 서책이 『남계실기』인 바, 보다 쉽게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국역(한글 번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제 33대 성균관 관장 손진우의 '축간사'에서 가려뽑은 글. 남계 손응현 공은 신라 효자 손순의 후손으로 경주손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선비 집안의 후예입니다. 남계공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임진왜란 당시 29세로서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 정용군의 일원이 되어 왜적의 척결에 앞장섰습니다. “군주가 욕되게 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니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하면서 어린 아들과 젊은 부인을 남겨두고 비장하게 의병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임진년 7월 하순 영천성을 수복하고, 8월 초 자인 전투에 참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연이은 경주성 탈환전에는 중과부적으로 영천의 많은 사대부 출신 의병들과 함께 한날(음 8월 21일) 한시에 경주 서천에서 장렬히 산화하셨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들의 공적을 기려 사후 벼슬을 내렸는데, 손공은 봉훈랑 의빈부도사의 관직을 수여하였습니다. 이후 경상도 유생들의 상소로 세워진 영천의 고천서원 순국사에는 남계공을 비롯한 10명의 충렬지사가 배향되고 있으며, 『충현록』에 영천 10현의 행적이 실려 있습니다. =남양 홍기섭 '남계실기 서'에서 가려뽑은 글. 삼가 살펴보건대 응현공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 충절과 절의와 문학과 덕업이 찬란하고 혁연히 빛나니 앞에서 길을 열어주고 뒤에서는 몸소 실천하므로 한강 이남에서 훌륭한 명문 세가이다. 애달프다. 후손이 떨치지 못하여 전래한 언행이나 실록이 없어지고 사라졌으니 마음이 답답하고 위태로운 일이니, 이것이 어찌 오늘에 남겨진 후손의 통한이 아니리요. 능히 후세의 열사에 가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러나 송나라 문충공 구양수는 덕행과 공업과 문장을 영원히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몸을 수신하고, 비록 말씀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일을 베풀라고 하였다. 가히 오늘 공의 덕행이 이미 수신하여 공업이 또한 일에 다 베풀어져 있으며, 충절이 또한 이와 같으니 찬란하게 빛이 나도다. =방예 손후익 찬에서 가려뽑은 글. 자인의 적을 섬멸하고, 경주의 전투에 나아가셨는데, 좌도를 맡은 권응수 장군이 적을 가볍게 보고 실수한 것과 병사 박진이 절제를 소홀히 하여 흥해와 연일의 고을 수령들이 먼저 달아나 대군이 마침내 무너지니 공과 같은 고향의 17인 의사에게 맹세하며 이르시기를 “오늘의 전투는 전진만 있고 후퇴는 없다.” 하시고 힘을 다해 싸우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이 훼손되어 거두지 못하고 남기신 옷으로 청송군 현서 문천리 세봉 장등에 장사 지내고 제사를 모셨습니다. 같은 날 순절하신 분은 최인제 정의번 김연 이득린 이호인 이영근 이순복 이지암 류복흥 전억주 이득룡 한득의 전홍채 이일장 류원길 이정분 등입니다. =손진담 박사는 1944년 고경면 용전리 출신으로 영천중학교와 경북대사대부고, 경북대지질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레딩대 대학원을 거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석유지질팀 책임연구원과 부산대학교 초빙교수, KISTI 전문연구위원 겸 국립중앙과학관 큐레이터로 활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