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남원지역 임진정쟁사 학술대회 성료 2021-12-10

2021년도 1209() 오후 한 시, 남원 지역 임진전쟁사 연구 학술대회가 코로나 19로 인하여 엄혹한 가운데, 우선 3차 접종자 확인, 사회적 거리 두기로 등으로 방역을 철저히 한 속에 남원시노인복지관에서 ()대한노인회 남원지회 강당으로 옮겨 최소한의 인원(50)으로 개최했다어려움 속에서 서도 충렬공천곡송상현선생 후원회, 충헌공홍세공선생 후원회 홍순벽, 충청남도 도지사 양승조, 남원양씨용성부원군대종회 회장 양해태, 문충공류선룡선생 후원회, 충무공 이순신 장군 후원회, 부용당성안의선생 후원회 성기호, ()전라좌의병장 삼도임계영선생 기념사업회 임행모, 주식회사 전북고속 대표이사 사장 황의종, 무민공황진장군종중 회장 황의옥, 남원양씨충장공파 종중, 남원양씨평이공파종중 회장 양해필 등의 화환이 답지했다.

 

1부는 김병호 감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비말로 애국가 진행은 생략하고 묵념만으로 국민의례를 마쳤다.

 

유한성 회장은  "우리나라 임진전쟁사에 영원히 기록될 남원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임진 전쟁 사연이 점철된 천혜의 요새이며 방어 거점인 역사의 고장 남원시 노인복지관 대강당에서 개최하는 南原地域 學術大會는 본회 주최 29번째가 되는 대회인 동시에 전북지역에서 처음 개최하는 학술대회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본회 주최 학술대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신 남원시민 여러분과 이환주 남원시장님, 양희재 남원시의회 의장님을 비롯한 남원시의원 여러분과 각 기관장님 여러분과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원님들께서 다 함께 자리하시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마련하는 엄숙한 자리에서 본회를 대표해서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本會2012년에 4회에 걸쳐 개최한 國際學術大會에서 壬辰 戰爭史에 대해 총론적으로 조명했으며 20141031大邱 地域에서 개최한 學術大會부터 壬辰 戰爭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國內地域을 선정하여 거점별로 조명하는 등 각종 연구 활동을 통해 임진 전쟁의 진실을 밝혀 전체의 壬辰 戰爭史 硏究正統性을 확립시키고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점별 연구의 결정체가 대구광역시로부터 2014~2016년까지 재정지원을 받아 大邱 地域 壬辰 戰爭史를 조명하여 2017년에 간행한 大邱地域 壬辰亂史》 Ⅰ집이고, 2018~2020년까지 재정지원을 받아 2021년에 간행한 大邱地域 壬辰亂史⟫Ⅱ집이며, 나아가 慶尙北道로부터 2015~2018년까지 4개년에 걸쳐 재정지원을 받아 慶北 道內 9개 지역 임진 전쟁사를 조명하여 20186월에 간행한 慶北地域 壬辰亂史3권입니다.

이 두 書 冊이 지역별 임진란사 연구의 基本書가 되고 典範이 되길 기대합니다.

本會는 각종 학술대회를 통해 얻어진 결과물 가운데 보존 가치가 있는 書 冊들을 계획을 세워 순차적으로 간행해 오고 있습니다.

2013년에 壬辰亂 文獻目錄·Ⅱ》 2권과 壬辰亂 硏究叢書4. 2016년에 壬辰亂 偉勳錄7권을 간행했고, 2018년에 임진란 7주갑 기념 畵報集을 간행했으며, 2020년에 연구총서 발간의 첫 사업인 壬辰亂期 聾啞堂 朴弘長救國 活動 硏究를 발간했습니다.

공사다망하심에도 시간을 할애하시어 환영사를 해주실 이환주 남원시장님과 축사를 해주신 양희재 남원시의회 의장님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욱이 본 학술대회에서 열과 성을 다해 연구하신 주제 논문을 발표해 주실 학자 여러분과 토론자 여러분 및 남원지역 본회 참가 문중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本會2017년에 개최된 本會 主催 청주지역 학술대회 논고를 비롯한 강원도 삼척지역 학술대회전남 순천지역 학술대회 논고와 이곳 전북 남원지역 논고를 정리하여 忠淸全羅江原 地域 壬辰亂史를 발간하고 2018년에 개최된 本會 主催 부산지역 학술대회 논고를 비롯한 경남 합천지역 학술대회 논고와 경남 거창지역 학술대회 논고를 정리하여 釜山慶南地域 壬辰亂史2022년 상반기에 발간할 예정입니다.

연이어 本會는 본회창립 10주년이 되는 2020년을 기점으로 창립이래. 본회가 다방면에 걸쳐 다채롭게 펼쳐온 모든 활동을 담은 10년간의 기록총서가 되는 壬辰亂 7周甲記念 文化·學術大祭典 白書를 발간하는 사업을 착착 진행하여 2022년 하반기에 발간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행정지원을 비롯해 행사 진행에 만전을 기해주신 남원시 김종혁 주무관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매번 본회 주최의 행사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시고 경향 각지에서 왕림해 주신 단체 회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개회를 했다.

 

이어 양희재 남원시의회 의장은 "신축년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남원 지역의 임진전쟁사 연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저 임진전쟁사 연구의 정통성 확립에 헌신해 오며 오늘의 학술대회가 열리기까지 애써주신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류한성 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주제 발표와 토론자로 참석하시어 심도 있는 토론의 장을 열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와 환영의 말씀을 전합니다.

  ​임진정유재란기 우리 남원에서는 항왜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양대박 선생은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운암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극복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투였습니다.

  또한 훌륭한 군사지휘관이자 일신의 무력도 뛰어났던 남원출신의 황진 장군은 웅치 안덕원 전투, 이치 전투에서의 활약과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의 혁혁한 공훈으로 볼 때 조선 역사상 최고의 용장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 정유재란이라는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고장 남원에서는 민군이 하나 되어 왜적에 끝까지 대항하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희생하며 조국을 위난으로부터 지켜냈으니, 그 아픔은 만인의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우리지역 임진전쟁의 역사적 사실과 공적이 조명되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이어지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당부 드린다"며 축사를 했다.

 

제2부 사회는 김양조 감사가 맡아서 진행했다.

 

제1주제로 임진정유재란기 남원지역의 항왜활동(抗倭活動)과 전투를 김경태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가 발표했다.

 

제2주제는 임진란과 양대박(梁大樸) 선생의 항왜 활동(抗倭活動)과 그 전쟁 기여로 김강식 한국해양대학교 인문한국 교수가 발표했다.

 

끝으로 제3주제는 임진란과 황진(黃進) 장군의 항왜 활동(抗倭活動)과 그 전쟁 기여로 김한신 고려대학교 강사가 발표했다.

 

종합토론에서 류한성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장이 좌장을 맡아 진행했다.

 

문경득(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1. 이 발표문의 주제는 임진·정유재란, 특히 정유재란 당시 남원 지역에서 있었던 남원성 전투가 중심입니다. 현재 발표문의 구성은 이러한 남원성전투를 둘러싸고 선조실록이나 난중잡록같은 조선 측의 사료를 중심으로 한번, 명나라에서 남긴 사료로 한번, 일본측의 사료로 한번씩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다시 종합해서 남원성 수비의 전모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면 시간순으로 사료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강화협상이 파탄나고 재침공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준비 단계-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전개-남원성 전투 단계- 전투 종료 후 단계 등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사료를 재배치하여 조선과 명, 일본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면서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발표자가 이렇게 수정하려면 손이 많이 가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서술된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훨씬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3. 남원성의 항전에서는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을 각각 인용해서 서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소 내용이 중복되므로 합쳐서 서술하되 간단하게 차이점만 언급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3. 명군의 입장과 전투 후의 양상에서 서술되는 준비과정은 내용상 앞부분인 2. ·명군의 방어책과 남원성 수축 쪽으로 가는 게 당시 수비 전략과 수성 계획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3.일본군이 본 남원성 전투 부분에서 인용된 사료들도 시간 순서대로 필요한 부분에 간다면, 좀 더 해당 시점의 사건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 정유재란 직전 상황에서 당시 한반도 내 일본군 거점을 간략하게라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맥상 경상도 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몇 줄이라도 서술해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3. 이 사건의 중심이 되는 남원성, 정확히 남원읍성은 현재 실물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에 관해 2018년부터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남원읍성을 조사한 보고서가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본 발표문은 지역사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므로 전문적인 군사사(軍事史)까지 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한 자료도 활용해서 방어시설이나 남원성에서 농성 가능한 최대 병력 규모 등도 추산해보면 좀 더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각주 68번에 보면 당시에는 남원의 군민이 모두 흩어져 명군이 홀로 지키게 되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발표자는 이러한 인식이 사실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남원성의 크기를 고려하여 주둔 가능한 인원을 추정할 수 있다면 백성들이 남원성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유 등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4. 2.·명군의 방어책과 남원성 수축이나 3.명군의 입장과 전투 후의 양상에서 남원성 수비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남원이 평야라 기병(기마병)을 배정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각주에서 수비 전술에서 기마병을 운용하려면 아군과 적군 간의 비등한 전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양원이 기마병을 운용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좀 더 고찰할 여지가 있을 듯 합니다. , 수성전에서 기마병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당연히 당시에도 모두 알던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조 등이 이처럼 언급하며 기마병을 배치하려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전주에서 보낼 구원군이 남원성을 포위한 일본군과 대치할 경우 성 내에 기마병이 있을 경우 효과적으로 호응할수 있다거나, 혹은 교룡산성을 끼고 남원성을 수비할 때 교룡산성 주둔군과 호응하기 좋다던가 등등을 고려한 선택일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5. 발표문에서는 교룡산성을 두고 명군의 남원성 수비 전략과 조선군의 수비 전략에 차이가 있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만 본 발표문이 군사사 연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어서 서술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그래도 남원성 전투를 둘러싸고 서로 이견이 있었던 점은 분명하므로 대략적으로라도 이러한 관점 차이를 부각하여 서술하는 부분도 필요할 듯 합니다.

왜냐하면 수비 전략에서 주로 의견의 갈린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산성과 함께 수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교룡산성은 남원의 북서쪽에 위치한 성으로 평지에 위치한 남원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고지라고 생각됩니다. 후대의 일이지만 1728년 무신란 당시에 경상도에서 반란군이 넘어올 것에 대비하여 남원성을 정비하면서 동시에 교룡산성도 함께 정비하고 준비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산성이 점령당할 경우 일본군이 이를 근거로 작전을 펼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고 각주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 마지막의 지도를 보면 일본군은 남원성을 사방에서 포위했으므로 주변의 고지인 교룡산성도 점령해서 남원성 내 수비상황을 들여다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발표문에 보이지 않아서, 혹시 조정에서 염려한 것처럼 일본군이 실제로 교룡산성을 점령했는지 여부도 궁금합니다.

  6. “남원의 축성 방법이 일본군을 방어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는 내용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서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듯 합니다. 다시 사료를 확인해보니, 조선의 축성 방식이 가지는 문제나 남원성이 평지에 위치한 성이라는 점 등을 지적한 내용이 아니라, 양원이 주둔하여 수비를 준비하면서 남원성을 보강했는데 이때 현안(懸眼)’까지 막았다는 내용으로, 북쪽 출신이라 왜구에 대항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러한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서술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7. 일본군이 진격로와 관련해서 문맥상 지리산 남쪽을 통해 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 일본군 사료를 보면 여러 경로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부분이 실제 전투상황에 대한 서술에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경우, 여러 사료를 종합해서 정리가 되면 좀 더 남원성 전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번거로우시겠지만, 추가로 지도가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군 진격로의 경우, 둔산령, 숙성령 등으로 의 지명이 등장하는데, 따로 고지도 등을 찾아보니 둔산치, 숙성치 등으로 표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 지도를 살펴보니 이동 경로는 평야 쪽이라기보다는 지리산 밑자락 쪽의 고개를 넘어서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명으로만 드러난 이동경로가 지도에 표시된다면 훨씬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일본 측 지도도 있는데, 이 지도가 남원성 전투를 설명하는 부분에 들어가고, 거기에 추가로 설명이 붙으면 독자가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 남원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탈출한 양원은 결국 처형이 되고 맙니다. 이 와중에 조선이 양원을 구명하려고 노력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발표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왜 조선에서 명나라의 패장을 구명하려 했는지에 대해 혹시 기존 연구나 발표자께서 생각해보신 내용이 있으면 간략하게 각주로라도 서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9. 사료의 측면에서 개인이 남긴 기록물은 다소 신뢰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후대의 기록이지만 무신란과 관련된 보고서를 모은 무신별등록이나 심문·진술을 모은 무신역옥추안의 내용과 호남절의록의 무신란 관련 내용을 비교한 결과, 호남절의록에서 상당한 왜곡과 허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난중잡록에 나타난 의병의 활동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 다른 기록과 비교를 통해 교차검증이 필요한 사료인지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사료인지 궁금합니다.

  10. 서론 등에서 오희문의 쇄미록을 언급하고 있는데, 막상 발표문에서는 지도외에는 따로 언급되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쇄미록에서 남원성 전투를 언급한게 있는지,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전경목(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양대박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호남에서 처음으로 거병해서 왜적을 물리칠 수 있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 운암전투에서 왜적에게 크게 승리하여 임진왜란 전투사에서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활동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아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김강식교수께서 양대박의 항외 활동과 전쟁에 기여한 점을 규명해주신 것에 대해 먼저 경의를 표합니다. 약포 정탁의 <양대박전>, 오희문의 <<쇄미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탁영의 <<정만록>>, 윤행임의 <운암승전비> 등에서 운암전투에 관련 자료 등을 찾아 치밀한 분석을 통해 운암전투의 상황을 복원하려고 한 점에 대해 크게 치하드립니다.

  질문 하나를 드리는 것으로 토론자로서의 소임을 가름하려 합니다. 정탁이 지은 <양대박전>에는 재산을 다 흩어서 지방의 호족들과 두터운 정을 맺으며 굳게 약속하고 서로 힘을 다하여 왜적과 싸울 것을 맹세하고, 군 스스로 격문을 초하여 여러 고을 원들과 사민에게 전파하여 장차 스스로 일어나서 의병장이 되려고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장수현에서 머물며 임진왜란 초기 상황을 기록한 쇄미록에는 양대박의 거병과 격문 등에 대한 기록이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참고로 쇄미록에는 임진왜란 초기에 장수현에 주변에 있었던 왜군의 침략 사실과 떠돌던 소문 및 전래되었던 공문과 격문 등을 모두 기록해 놓았습니다. 오희문은 일종의 기록벽이 있어서 듣거나 본 것은 모두 옮겨 적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저와 김경태교수님이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남원과 인접해 있던 장수에 머물렀던 오희문이 왜 양대박의 거병 사실과 격문 등에 대해서는 듣고 보지 못했는지 의문입니다. 설령 바로 듣지는 못했더라도 추후라도 보고 들었으면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을텐데 왜 기록이 없는지에 대해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김소희 박사와 함께 양대박의 후손가에 전래 되어 오던 고서와 고문서를 조사해서 문화재로 지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고문서는 조선 전기로 올라가는 것은 없지만 정조 때 양대박이 추증되는 과정 등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고서 중에는 양대박의 문집과 관련해서 <<송암고>>, <<봉래행록>>, <<청계정사수창록>>, <<청계유고>>, <<청계집>>, <<양대사마실기>> 내사본, 그리고 이 집안 출신의 인물은 양경우, 양형우, 양주익 등이 작성한 유문과 문집초고본 등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1583년에 충청감영에서 간행된 <<목은문고>>, 갑진자본 <<당백가시>>, 및 을해자본 <<이상은시집>> 등은 유일하거나 희귀본으로 곧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문서와 고서 등이 문화재로 등록되고 아울러 곡성에 있는 청계동이 문화경관지역으로 지정이 되면 청계 양대박과 그의 두 아들 양경우와 양형우에 대한 연구 작업 등도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정윤화 (인천사연구소 연구원)

16세기 말 7년에 걸쳐 치러진 임진전쟁은 안으로는 5백 년 역사의 조선 왕조가 이전과 이후로 변화하는 분수령이 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밖으로는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 중국과 일본, 여진 등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지각변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도 하다. 저자는 임진전쟁 초기 일개 종6품의 무관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던 황진(黃進)이라는 인물을 통해 임진전쟁과 후대의 기억을 서술하였다. 토론자는 저자가 주장하는 논지에 대해 동의하는 바가 많다는 점을 전제하고, 향후 저자의 글이 더욱 완성도를 갖추는 데 일조하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감상과 의문을 제시하는 것으로 토론자로서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남원 출신의 황진은 임진전쟁 초기 용인전투를 비롯하여 이듬해 제2차 전주성 전투에서 순국하기까지 불과 12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한강 이남에서 벌어졌던 초기 주요 전투에 참전하였다. 특히 그는 웅치(熊峙)이치(梨峴)2차 진주성의 주요 세 전투에 모두 참전하여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호남지역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인물이다.

  우선 이 발표는 임진전쟁 초기인 1592~1593년에 걸쳐 항전 활동을 펼쳤던 황진(黃進) 장군의 생애와 그가 세웠던 전공에 대한 후대의 현창과 기억에 대해 분석한 사실상 첫 논문이라는 점에서 연구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간 임진전쟁 관련 인물사 연구가 당대 조정의 중신이나 무신, 의병장 등 특정 인물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을 참작하면, 임진전쟁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도록 그 외연을 확장하는데 이바지한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황진의 활동과 관련하여 저자는 본 연구에서 황진의 생애를 통해 그가 임진전쟁 시기 적극적인 항전 활동을 펼치게 되었던 계기를 살펴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란 시 그의 군사 활동, 그의 사후 이루어진 추증 및 현창 활동의 과정과 후대의 평가를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은 그의 생전 활동과 사후에 이루어진 후대의 평가라는 두 가지 큰 주제를 별도로 분리하지 않고 연속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동시에 후대에는 황진에 대한 기억이 어떠한 형태로 소환되어 재구성되는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몇 가지 의문과 제언

  1) 2장 황진의 생애 가운데서 황진은 1590(선조 23) 통신정사로 파견된 황윤길(黃允吉)의 수행 군관으로 이듬해 봄까지 일본에 체류하였다. 이 기간 일본에서 황진의 행적은 향후 그의 삶에 중요한 전기(轉機)로 작용하는데, 그와 관련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이 궁금하다. 황진은 군인으로서 독자적으로 일본 현지의 적정을 파악하여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사적으로 일본도를 두 자루 구입하여 훗날 그 칼로 왜적을 무찌를 것을 결단하였고, 귀국해서는 주색(酒色)을 끊고 전란에 대비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과의 협상에 우유부단하게 대처하는 김성일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며, 귀국하여서는 김성일을 주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시도하였다. 따라서 일본에서 황진의 행적은 그의 사후 추증, 후대의 기억과 평가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 임진전쟁과 관련한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관련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되고 설명되었으면 좋겠다.

  2) 21절에서 저자는 황진은 임진전쟁 초기 중요한 전투인 웅치이치진주성 전투에 모두 참전하여 삼남(三南)의 거점을 방어함으로써, 조선 측에 회생의 불씨를 살려주었다.”라고 하였다. 세 전투 가운데 황진이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투는 단연코 이치전투였다. 그러나 그의 전공에 대한 포상은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반면에 당시 일본군 내부에서는 일본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삼대 패전을 행주대첩한산도대첩에 이어 이치전투로 꼽았다. 이에 대한 관련 자료의 분석과 의미 부여가 보충되기를 바란다.

  3) 3장에서 황진에 대한 기억을 시대별로 구성하는데 인용한 자료가 매우 소략하고 한정되어 있다. 그 상세를 보면 17세기에는 김육송시열안방준조익김상헌장유 등과 같은 서인(西人)이 기록한 행장묘비명시장(諡狀) 등의 자료가 대부분이다. 18세기에는 황진의 방손(傍孫)인 황경원과 위백규, 이상정 정도가 언급되었고, 19세기에는 정약용이 유일하다. 이 정도의 자료 분석을 통해 후대 황진에 대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4) 3)과 관련하여 우선 황진이 문집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과 17세기 황진에 관한 기록이 주로 서인에 속했던 황진의 후손이 유력한 서인들에게 부탁하여 작성된 기록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은 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17세기 국가적인 차원에서 임진전쟁 관련 충효열을 기억하고 전승하기 1617(광해 9) 정부에서 간행한다.

 

 

 

 

 

학술대회가 끝난 후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어려운 관계로 학술대회를 빌려 이사회와 총회를 했다.

 

김양조 이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어려운 관계로 학술대회를 빌려 이사회와 총회를 하게 됨을 양해해달라고 말하고 건강에 유의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고하는 말로 인사말을 가름했다.

 

김병조 감의 감사보고가 있었다.